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니.... 2002-05-15 11:50:37 (벧전 3:13-22) // 2002년 5월 5일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귀엽습니다. 보면 볼수록 예쁩니다. 특히 아이들의 밝게 웃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이 아로 새겨져있고, 또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천진 난만(天眞爛漫)한 모습이야말로 주님의 성품을 닮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이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유아세례와 아동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유아세례나 아동세례나, 성인이 되어서 받는 세례나 모두 일생에 한번 받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사람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겠는가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표요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는 것"이기에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세례식이 끝난 후에 세례를 축하하는 순서를 갖습니다. 세례란 어둠의 권세 아래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성별(聖別)된 사람, 즉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目的)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들은 세례 받은 아이들에게 "너는 세례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까요?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삽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서두르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뜻하신 바로 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신다고 믿기에 늘 마음이 든든한 것입니다. 세상에 의지할 것이 별로 없어도, 온 우주(宇宙)의 주인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이 되시고, 능력이 되심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초조해 합니다. 이런 우리를 보고, 주님께서 "너희가 어찌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고 한탄하실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고 선하게 인도해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사셨으면 합니다. 저는 남보다 좀 늦게 37살이 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습니다. 네 식구가 다 갔습니다. 정말 하나님만 믿고 갔습니다. 처음에는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역사 하셔서 하나 하나 선하게 해결해 주시는 것을 보면서,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확고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하나님께서 생사(生死) 화복(禍福)을 주관하신다고 말만 하지 말고, 그걸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한 다음에 그 결과를 하나님께 다 맡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됐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세례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그의 시민권(市民權)은 하늘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세례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해도 바울 처럼 날마다 [自我가] 죽어야 하며,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는 한 번 받지만, 성령은 계속 받아야 합니다. 은혜도 계속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깨어 기도하고, 주님께 나와 겸손히 무릎꿇고,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오늘 세례 받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라면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봅시다. 1. 마음으로 주님을 거룩하게 높이며 삽시다. 15절에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표준 새번역에는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높이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이 평생 추구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마음에 모셔들이고, 날마다 그분을 드높이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주님을 우러르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우러러 모시고 살면, 날마다 희망에 찬 경외의 태도를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수(Sioux)족은 매일 마다 신(神)을 찾아 뵙는 의식(儀式)을 한다고 합니다. 매일 마다 동틀 무렵 일어나 노루 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고 물가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차고 깨끗한 물을 얼굴에 한 움큼 끼얹거나 아예 전신을 물에 담급니다. 목욕 후에는 밝아 오는 여명, 지평선 위로 춤추는 태양을 향해 똑바로 서 침묵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 예배는 동료들간에도 서로 먼저 가거나 뒤따르거나 해야지, 같이 가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아침의 태양, 신선한 대지, 위대한 침묵의 신(神)을 영혼마다 단독으로 만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새벽마다 하는 의식(儀式)을 상상하다 보니 이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는 변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우리 삶이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믿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날마다 드높이며 사는 것이 신자된 우리의 마땅한 의무요 봉사입니다.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의 말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만물의 겉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볼 줄 알며, 그는 희망에 찬 외경(畏敬)의 자세를 가지고 산다." 참으로 의미 깊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또 하루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정신을 차리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나아와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며,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삶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가 드리는 새벽기도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노년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유지하고 복음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50여 년 간 항상 아침 4시에 일어난 것 교회에 가서 새벽 5시에 설교(기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는 하지 않더라도,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전에 나와 엎드려 첫 시간을 주님께 나와 예배드리며, 자신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드높이고, 우러르는, 기도 생활에 힘쓸 때,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힘입고, 지혜와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귀하고 복되게 살 수 있습니다. 2. 뜨거운 마음으로 선을 행하며(사랑하며) 삽시다. 13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보면 "여러분이 뜨거운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은 뜨거운 마음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선을 행한다고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포타라모라는 인디언 노인이 멕시코의 어느 대형시장 그늘진 어느 한 구석에 앉아 양파 스무 줄을 걸어놓고 팔고있었습니다. 그 때 미국 시카고에서 온 한 미국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입니까?" "10센트라오," 포타라모는 말했습니다. "두 줄에는 얼맙니까?" "20센트라오." "세 줄에는요?" "30센트라오." 그러자 미국인이 말했습니다. "별로 깎아 주시는 게 없군요. 25센트 어떻습니까?" "안 되오." 인디언이 말했습니다. "스무 줄을 다 사면 얼맙니까?" 미국인이 물었습니다. "스무 줄 전부는 팔 수 없소" 인디언이 대답했습니다. "왜 못 파신다는 겁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 미국인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이 답했습니다. "아니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있는 거요.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서라피(멕시코 남자가 어깨에 걸치는 모포)를 사랑한다오.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페드로와 루이스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이며 농작물 얘기를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친구들 보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걸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파는 거요.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오.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나누는 삶이 바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자세를 가질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평생토록 좋아하는, 북경 원인을 발견한 생물학자요 위대한 신학자(神學者)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사랑'을, 그리스도로부터 발산되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거대하며 신비로운 힘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또 위대한 기도의 사람 십자가의 성(聖) 요한은 "하루가 저물 때 우리는 사랑한 것을 기준으로 심판 받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고 했습니다. 크나 큰 사랑을 위로부터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부터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두운 감옥에] 갇힌 영혼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삽시다. 19절을 보면,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공동변역으로 보면,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옥에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셨듯이, 과거의 상처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자유와 해방과 치유를 주는―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감옥에 갇혀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인(成人)이 되어서도 '버림받은 느낌'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자신의 배우자가 고아였음을 알고는 엄청나게 서러워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는 고아를 '버림받은 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자신이 고아는 아니지만, 무언가 버림받은 느낌이 있음을 꿈(무의식)이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 어릴 때 따뜻한 엄마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내적 아이가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고아(孤兒)였음을 알고―그렇게도 슬피 울었던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죄와 어둠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해 주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결코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요즘 엽기적인 살인을 감행한 젊은이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착잡한 모양입니다. 그런 젊은이들은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고 그런 일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들에게는 "너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뜨겁게 느끼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잘못 될 리가 없습니다. 사랑은 주님과 우리를, 우리와 이웃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골 3:14참조)이기에 말입니다. 켄 가이어라는 사람은 『묵상하는 삶』이라는 책에서 요한 14-17장을 각색해서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가지만 너희를 혼자 두지 않겠다. 내가 보낼 나의 영이 너희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이마 위를 미풍처럼 스치며... 내 사랑을 속삭여 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희 곁에 있다... 가장 즐거운 날에도, 가장 어두운 밤에도, 나는 너희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너희를 맞아 들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려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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