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사람의 별명 2002-05-03 17:26:14 사무엘하 24:17-25 오늘은 사무엘하 24장 17절에서 25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는 사람의 별명"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믿음의 별명이라고 할 만한 낱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기 까닭에 믿음의 별명은 감사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런가하면 믿지 않는 사람은 충성을 하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충성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별명을 충성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도 믿음의 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에도 별명이라 할 수 있는 낱말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면 우리 믿는 사람에게도 별명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들면 옛날 안디옥교회 교인들의 경우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큰 환난과 핍박을 만났을 때 뿔뿔이 흩어져 가는 중에 안디옥으로 내려 간 사람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에서 세계선교사를 최초로 파송을 합니다. 그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안디옥교회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좋은 말이 아니었고, 조롱하는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별명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가만히 읽어보면 믿는 사람은 이런 별명이 있다, 혹은 가져야 한다는 뜻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제목을 '믿는 사람의 별명'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라 믿는 사람의 별명에 대해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첫째, 해결하는 사람 (17-19)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평안한 곳에 가서 문제를 야기시켜서는 안됩니다. 믿는 사람은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람 즉 해결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본문의 다윗은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질만 했습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요나라고 하는 선지자에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40일 후에 이 성은 망한다'는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회개하면 삶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 말씀은 요나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다시스로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되고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풍랑이 심해져 배가 깨어질 상황이 되자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바다에 던져 버립니다. 그래도 풍랑이 멎지가 않습니다. 풍랑을 멈추게 하려고 각자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찾아 기도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가 당첨이 되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우리가 이 풍랑을 당해야 되느냐?"하고 묻습니다. 그 때 요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고 말을 합니다. "풍랑을 만난 것이 바로 나의 연고요, 하나님을 거역한 죄 때문에 이런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 가는 길에는 반드시 큰 풍랑과 같은 장애물이 나타나 가는 길을 막아 놓습니다. 이런 경우 요나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되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고 하면서 책임을 떠맡고 나섭니다. 분명히 문제의 원인이 요나 때문인데 요나가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요나가 '내 책임이다'하고 나섰을 때 "그러면 너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라고 사람들이 묻습니다. 요나는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을 합니다. 요나가 살겠다는 것입니까? 죽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래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풍랑이 그쳤습니다.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 요나가 큰 고기 뱃속 들어가 3일동안 죽을 고생을 합니다. 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요나가 회개를 얼마나 단단히 합니까? 나중에 그 큰 고기는 요나가 떠났던 육지로 와서 요나를 토해 버립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두 헛고생이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원점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저 버리면 죽을 고생을 해도 그 고생은 헛고생이 되고 맙니다. 결국은 나중에 가라고 명하신 니느웨까지 갔습니다. 모든 엄청난 문제가 '나 때문이다'하고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앞에 잘 못을 회개했고 살려주고 살려주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었습니다. 용서해 주는 것과 용서해 주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었습니다. '책임지고 회개하는 일은 내가 할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풀렸습니다. 오늘 내용도 그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에서 19절을 보면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시기는 다윗의 말년입니다. 죽을 때가 되었을 때 곱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노망은 아니었지만 노망끼 비슷한 것이 발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무엘하서 24장을 끝장으로 해서 열왕기상으로 넘어 가는데 거기를 보면 다윗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요압이라고 하는 장군을 시켜서 이스라엘 나라에 군대로 나갈 사람을 샅샅이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요압이 왕에게 "우리가 하나님 믿고 지금까지 살아왔지, 군대의 숫자 때문에 지금 우리 나라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임금님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래도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어쩔 수가 없는 요압은 대충 조사를 해서 왕에게 보고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노여워하시는지 갓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보내서 "네가 왕 된 것이 네가 잘나서 된 것이냐? 이스라엘 나라가 번영한 것이 군대의 머리수가 많아서 그렇게 되었느냐? 전부 나를 의지하고 나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 죽으려면 곱게 살다가 곱게 죽을 일이지 왜 말년에 이렇게 노망을 떠느냐?"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크게 야단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너에게 이제는 재앙을 내릴 수 밖에 없는데 7년 동안 큰 가뭄이 좋겠느냐? 아니면 3개월 동안 대적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겠느냐? 삼일동안 온역 재앙을 당하겠느냐? 셋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다윗이 "내가 하나님의 손에 빠져 재앙을 당할 지언정 사람에게서 쫓겨다니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때부터 온역 재앙이 내려 백성들을 치시므로 백성들이 죽어갑니다. 다윗이 '이래서는 안되겠다'싶어서 예루살렘에서 조금 높다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 가보니 천사가 온역 재앙을 총 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 잘 못했으면 내가 잘 못했지 백성이 잘 못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치시려면 나를 치시고, 치시려면 내 가정 내 아비 집을 치실 일이지 왜 백성을 치십니까?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까? 내가 분명코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죄를 범했습니다."라고 단단히 회개를 했습니다.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치시면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할 일이고 회개 한 후에 하실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회개를 열납하신 하나님께서 "그러면 좋다. 네가 조금 더 올라가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있는데 그 곳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라. 그리하면 그 제사를 받고 깨끗이 끝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급히 일어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달려갔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러고 난 후에 재앙이 뚝 그쳤습니다. 7만명이나 죽어가는 온역 재앙에 백성들은 큰 어려움과 죽음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다윗 때문이 아닙니까? 다윗이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죽을 죄로 잘 못했습니다'라고 회개하고 책임을 떠맡고 나섰기 때문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회개는 책임을 떠맡는 것이지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해결책에 의해서 제시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제시해 주는 해결책을 받아서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까? 문제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책임을 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바로 믿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여러분들도 살아가다 이런 저런 감당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고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책이 나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진단해서 병의 원인을 밝혀내야 하지 않습니까?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면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다윗은 문제의 원인을 분명히 알고 책임을 지고 회개하여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문제를 야기시키면 이렇게 엄청난 재앙이 됩니다. 그러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책임을 지고 나서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해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corneille이라고 하는 사람은 '책임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에도 책임을 다하고 '이제는 나의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하고 결과를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심지어 내가 잘못해서 나에게 엄청난 시련과 재앙이 유발되었다면 자기가 책임을 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도 하시고, 도와 해결도 해 주십니다.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은 우리가 집시다. 그러면 우리의 뒤처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은 책임지고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예배하는 사람 (20-21) 예수님께서 수가성에 사는 죄 많은 여인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꼭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찾으시냐면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요4:23). 오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지 설악산에 놀러 간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당회장이 또 스트레스 주네' 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꼭 주일날 교회에 나와야 되는가? 설악산에도 믿는 마음으로 가면 되지, 그렇다고 안 믿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말할런지 모르겠으나 그런말을 하고 싶으면 자기 아들에게 그 말을 하십시오. 즉, "너는 꼭 학교만 가야 되느냐? 그 동안에 네가 공부하느라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오늘은 설악산에나 가거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아들이 학교에 갈 시간에 설악산에 가도 된다고 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날은 하나님과 약속된 예배하는 날에 설악산에 가더라도 믿음으로 가면 된다고 하십니까? 그리고 왜 철야기도를 해야만 하는가? 하고 물으시기 전에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너는 꼭 밤새워 공부해야 되느냐고?"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학생이 밤을 새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밤낮 철야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때로는 철야기도를 해야 될 때 철야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형식적으로 나와 앉아서 두리번거리거나 인상을 쓰고 비비꼬는 태도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 그런 식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신령한 예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적인 예배입니다. 성령으로 역사하는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진리의 말씀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 무슨 말씀을 주실런지 모르지만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그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찾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 사람을 만나 주시고 그런 사람에게 은혜 베푸시고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배가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본입니다. 예배없이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합니까? 예배는 우리가 하는 온갖 봉사의 기본입니다. 예배 없이 봉사하는 사람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배는 드리지 않고 "내가 오늘 사정이 있어서 설악산에 가니까 내가 오늘 작정한 주일 헌금을 인편에 보낸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헌금이요, 봉사입니까? 하나님께서 거지입니까? 예배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모든 봉사는 예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배 없는 봉사는 봉사가 아닙니다. 봉사의 기본은 예배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역시 예배에서 출발하고 예배에서 꽃을 피우고 예배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모든 믿음의 기본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잘 되면 그 사람의 믿음이 잘 되고 예배가 엉망이면 믿음이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가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0절에서 21절을 보면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이 무엇입니까? '책임은 전부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다윗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가서 거기에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 받으시고 재앙을 끝내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한 시도 지체하지 아니하고 달려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농사를 지을 때 타작을 하고 낟알을 떤 다음에 바람개비로 바람을 일으켜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는 그 당시 바람개비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지방에는 바람이 많이 불기 까닭에 집터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마당을 만들어 놓고 타작을 한 다음에 낟알을 하늘로 던집니다. 그러면 쭉정이와 지푸라기가 날려갑니다. 그러면 알곡만 남습니다. 그래서 타작마당은 가장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갔습니다. 아라우나가 대왕이여 어쩐 일이십니까?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오는데 네 타작마당을 사고 소를 사서 거기에 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왔노라.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셨고 그리하면 재앙이 끝난다해서 지체없이 왔노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제사입니다. 신약의 제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제사를 기쁘시게 받으셨습니다. 또 기뻐하십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과 만나주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도움을 주십니다. 오늘날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찾으시고 도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런 극한 상황에 있을 때 설악산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제사를 드렸더니 응답이 되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러기에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 원하시는 시간에, 원하는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러스킨은 '누구에게 예배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귀신에게 예배할 수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마귀에게도 예배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에게 예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를 누구에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가 가장 귀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이런 사람을 만나 주시고, 이런 사람에게 은혜 주시고, 이런 사람에게 온갖 도움을 주시고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의 별명은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축복 받는 사람 (22-25) 축복이라고 하니까 자칫 잘못하면 '내가 너 보다 돈 몇 푼을 더 벌었다, 이것이 축복이다, 죽어 죽어 하다가 병고침을 받고 몇 년 더 살았다, 이것이 축복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찌기 믿음 생활을 그만 두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이 그런 축복이라고 한다면 우리보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습니까? 물론 우리들에게 이런 것이 축복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많은 축복 중에서도 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건강도 복입니다. 잘 돌아가는 명철한 두뇌도 복입니다. 남이 만들지 못하는 손 재간 즉 재능이 큰복입니다. 그런가하게 되면 우리들이 없으면 못 산다고 하는 재물도 큰복입니다. 또한 가정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런 것은 꼭 믿는 사람만이 가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믿지 않는 사람도 가질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복은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만의 복이라면 그는 믿는 사람으로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즉 성령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을 믿는 사람만이 받았고 그 결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까닭에 우리는 천국의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 나라에서 영생하지 않습니까? 이런 복은 세상 것과 바꿀 수 없는 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 것은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없을 지라도 믿는 사람만이 받는 복은 절대 돈을 가지고 살 수 없는 복입니다. 어디에 가서 공부해서 학위 받듯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가서 훈련받고 또는 공로를 세우고 댓가로 받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받는 복이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에서 말하고있습니다. 구원을 돈주고 살 수 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공로의 댓가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는 사람만이 받는 이 구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 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히 사는 영생, 이 모든 것이 정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축복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런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2절에서 25절을 보면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고 하였습니다. 역대하 3장 1절을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오르난은 아라우나의 별명입니다.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돈 주고 사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기도를 받으시고 재앙을 끝내시고 문제를 돕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엄청나게 은혜 받은 자리입니다. 분명히 다윗의 땅입니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된 다음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어디에 지었습니까? 옛날 조상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했던 모리아산, 그 모리아산 위가 바로 아리아나의 타작마당입니다. 그 땅은 아버지가 은 50세겔을 주고 산 땅입니다. 아버지가 돈을 주고 사서 하나님의 성전 터로 받친 곳에 솔로몬이 왕이 되어 성전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왕통이 이어가다가 그 왕통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나신 것은 우연히 된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화위복이 되게 하셨고 그 자리를 은 50세겔로 사서 그 터를 하나님의 성전 터로 바치고 성전을 짓고 자자손손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이처럼 축복 받는 사람입니다. 축복 받는 사람이 여러분들의 별명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믿는 사람의 별명은 첫째,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야기된 문제라면 반드시 책임을 지고 회개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둘째,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을 꼭 찾습니다. 구약의 제사가 오늘날의 예배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축복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이 전화위복이 되고 축복 받은 사람이 된 것처럼 여러분들의 별명도 '축복 받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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