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아름다와 보일 때 2002-03-28 23:16:03 설교 본문 : 베드로전서 3:1-6 방송 듣기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그 가정의 뿌리는 부부입니다. 이 부부관계가 잘못되면 화목이 깨어지고 긴장과 억압이 생겨서 그 여파가 자녀에게 때로는 교회에까지 미칩니다. 교회에서 화를 잘내고, 신경질을 부리고, 공격적인 사람을 추적해 보세요. 어젯밤에 부부싸움을 했거나 오랜 부부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자를 세울 때는 원만한 가정, 원만한 부부관계를 이룩하고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가정 평화의 핵심인 부부관계를 누가 조정할 수 있습니까? 물론 크게 보면 양자 공동책임이지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여자가 조정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범죄 전에는 아담에게 먼저 말씀하지만 범죄 후에는 언제나 아내에게 먼저 말씀합니다. 어떤 여성은 "나는 못해요."하시겠지만 그런 분은 결혼 안한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여성은 남성에 대해서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돕는 배필이야말로 Better Half, 더 나은 반쪽이란 말입니다. 히브리어 Ezer란 말은 단순한 내조자가 아니고 구출자, 구원자란 뜻까지 있습니다. 과연 여자는 Goethe가 말한 것처럼 남자의 구출자요, 구원자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고전 11:9)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성의 영광은 남편의 Better Half가 되는 것이요, 장로와 제직들의 영광은 목사의 Better Half가 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직장에 나가서 땀흘리며 일할 수 있는 튼튼한 육체가 있고 투지만만한 정신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활에는 끝없는 도전과 경쟁의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 갈비뼈에서 나왔기 때문에 남자의 심리를 잘 알고 남자를 조정할 수 있는 천부의 능력을 타고 납니다. 남자는 평생가도 여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자야말로 남자에게 있어서 이해 불가능한 영원한 미궁이며 신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를 잘 압니다. 그래서 남자를 위로할 줄 알고, 도울 줄 알고, 그를 진정시킬 줄 압니다.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기쁠 때나 슬플 때에 어머니를 찾는 습관이 몸에 배여서 어른이 되어서도 기쁠 때나 슬플 때는 여성을 찾도록 그 본능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남편이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은 "너희 엄마 어디갔노?" 입니다. 아내 있는 곳을 모르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리브가로 인해 위로를 얻었다고 했지요(창 24:67). 진실로 세계는 남성이 지배하지만 남성은 여성이 지배하게끔 인간성의 구조가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성이 어떻게 남성을 조정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몇 가지 지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지혜란 평범한 것입니다. 여성의 본성을 유감없이 연출하여 남성의 본성이 바라는 바를 멋지게, 기막히게 실연하는 것입니다. 남성이 언제 여성을 아름답게 보는가? 라고 물어 보면서 남성을 수용하고 세워 줌으로서 여성은 남성과 함께 보다 나은 삶을 성취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성이 남성에게 물어 봅시다. "여성이 언제 아름답게 보입니까?" 남성이 대답합니다. "여성이 온유할 때 아름다와 보입니다."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은 부드러움의 고향입니다. 어디서 매를 맞고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감싸주시던 어머니의 품이 남성이 자란 고향입니다. 그런데 남자가 세상에서 마음이 상하고 자존심이 상한 채로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 있는 아내조차 표독하게 말하고 행동하면 그 거칠어진 정서가 어디에서 부드럽게 순화되겠습니까? 성경말씀대로 성내는 여성과 사느니 혼자 사는 것이 낫습니다. 성을 내되, 이리 성내고 저리 성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성격의 여자와 사느니 차라리 저 천마산 위에 혼자 움막을 치고 사는 것이 휠씬 나은 것입니다(잠 21:9,19, 27:15). 옛날에는 여자가 가출했지만 요즘은 남자가 가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성은 남성을 집안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옷을 잘 입고 외모를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오직 심령의 온유하고 안정된 힘, 곧 영적 힘이 있어야 됩니다. 얼굴이 이쁘고 몸이 아름다운 것은 잠시 뿐입니다. 이쁘고 아름다우면서 심성이 나쁘면 오히려 더 미울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참 못생긴 부인 한 분을 심방했습니다. 그래 제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 남편 참 불행하다고 했지요. 그런데 깜짝놀랐습니다. 인사하러 들어온 그 남편은 꼭 알랑 들롱 같아요. 곁에서 그 시어머니가 "우리 며느리는 우리 아들한테 입안에 혀라"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제가 눈여겨 보았더니 과연 그래요. 얼굴도 검고 어디를 뜯어보아도 분명히 못났기는 못났는데 그게 아니라 안으로부터 나오는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 자세와 모습과 어조에서 남편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이해가 조용히 비치어 나오는 것을 넉넉히 볼 수 있었습니다. "내 아들은 며느리 없이 못살아요!"라는 시어머니의 말은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남성을 향하여 여성이 내 기분을 맞추어 줄 사람, 내 변덕을 받아 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무한한 잠재력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래 남성이 자기 기분이나 맞추어 주면 좋겠습니까? 그런 여자를 만나는 남자는 불행한 남자입니다. 여성도 여러분, 아내가 주도권을 쥐고 온유함이란 위대한 내적 힘으로 남편을 사로잡으십시오. 그러면 곰과 같이 둔한 남편일지라도 그 여자 아니면 못살 줄 알고, 죽을 줄 모르고 자신을 다 내어 주며 충성합니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미안해 하는 존재가 남편입니다. 더 나은 반쪽인 여성들이여! 그 위대한 부드러움으로 남성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아내의 목걸이를 사 모은 사연). 알고보면 이 세상에 신랑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남편은 예수님에게 가장 버금가는 존재입니다. 아내의 머리속에 있는 얄팍한 성경 지식보다는 봉투채로 주는 남편의 행위가 훨씬 영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 물어봅시다. "여성이 언제 아름다와 보입니까?" 남성이 대답합니다. "여성이 겸손할 때 아름다와 보입니다." 현대에 와서 여성우위론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가 수상도 될 수 있고 국회의원도, 사장도 남자보다 휠씬 잘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겸손하라는 말은 사회생활하는 여자가 늘 겸손하여 큰소리도 못하고 권위도 부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성이 개인적으로 남성을 대할 때 상대적으로 작은 자가 되어 주어야 아름다운 여성의 위대한 힘이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남성은 자기보다 큰 자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남자에게 있어서 그 권위와 자존심은 양보할 수 없는 남성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이러한 남성을 이해하고 늘 작은 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설득할 때 남성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분문 6절에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라고 했는데 복종은 곧 겸손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이기려 하고, 논쟁을 하고, 지배하려고 들면 거부반응을 받게 됩니다. 싸우고 싶을 때는 오히려 부드럽게, 음악적인 음성으로 속삭이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여성은 남성을 도울 줄 아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도우는 자가 남성 전체를 지배해 버리면 도우는 자가 아니라 독재자가 되고 남성은 그 여성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여성은 남성에게 져줌으로써 함께 인간 승리를 구가해야 합니다. 남성은 사실 여성을 이기지 못합니다. 남성은 여성 자체를 이해하지도 못하거니와 여성을 수용하기에는 감수성이 너무 아둔합니다. 한 심리학자의 충고는 경청할만 합니다. "남성이여, 여성을 분석하려 들지말라 도리어 여성의 변덕을 즐기는 것이 지혜니라" 남자가 5년 만에 알 것도 여자는 5시간 안에 안다고 합니다. 그러한 남성을 보고 여성이 날 이해하고 날 도와 달라고 하면 남성은 갈팡질팡합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여자는 남성의 뒤안길에서 작은 자가 되어 그를 내세워 줌으로써 그의 충성과 애정을 무한히 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물어 봅시다. "여성이 어느 때 아름다와 보입니까?" "여성이 정열적일 때 아름다와 보입니다." 하고 남성이 대답할 것입니다. 여러분, 첫사랑의 정열에 홍조띤 여성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이 다 사라진 차갑고 딱딱한 사무적인 여성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여성은 이 세상에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습니다. 남성의 기대를 산산히 깨고는 "꿈깨라! 정말 살 맛없는 세상이다"라고 웅변해 줄 것입니다. 저보고 허무맹랑하고 실망스런 세계를 그림으로 묘사하라면 저는 딱딱하고 차디찬 젊은 여자의 얼굴을 그리겠습니다. 거기에다가 사나운 표정과 변덕스런 인상을 더해서… 피카소의 Gernica이래 최고의 명작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살펴보고 너희 첫사랑을 찾아 불일듯하라"(계 2:4-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꿈이며 애정의 대상입니다. 그 여성의 얼굴과 마음에 첫사랑의 정열이 언제나 서리어 있고 감사와 감격으로 반겨 주고 기뻐해 줄 때 남성은 생의 보람을 느낍니다(독일거주 여동생의 남편 환영과 외국인의 개 사랑). 그런데 남성이 그 첫사랑을 잊지 못해 언제나 아련해 하는데 여성은 도리어 악발이 현실꾼이 되어 곗돈, 진학, 험담, 증권병에 들어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주안에서 거룩한 부녀들이여! 제발 하나님이 주신 남성의 꿈이요 희망인 여성을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성이 중성이 되고 남성화까지 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요? 위대한 여성도들이여! 오늘날 남성이 왜소화 되어 가는 세대에 부드러움과 겸손과 정열로써 불쌍한 남성을 도와주십시오. 부디 부탁합니다. 여성을 포기하지 마시고 남성으로 하여금 강한 남성이 되도록 힘을 주십시오. 그럴 때 여성은 남성으로 인하여 배나 그 품에 인간성의 승리와 부요와 행복을 안게 되실 것입니다. 여성의 위대한 힘이란 진실로 남성보다 부드럽고 겸손하고 정열적인데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과 남성, 아내와 남편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성경의 결론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 앞에 완전한 남편이면서도 푸대접받는 초라한 남편으로 서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얼마나 온유하고 부드러웠으며, 겸손하게 순종하였으며, 정열적으로 봉사하였습니까? 성도 여러분,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 신랑에게 온유합시다. 영원한 사랑을 주신 우리 남편에게 겸손합시다. 영원한 나라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언제나 정열적이도록 합시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행복해 하심으로써 우리도 그분 안에서 배나 행복을 누리도록 합시다. 우리의 생활이 의기소침한 것은 우리 신랑이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교회안에서, 내 삶 안에서 의기양양하시면 우리 또한 의기양양해 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이전글 [주준태 목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신 일 :: 목록 :: 답변 :: 수정 :: 삭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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