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으로 성숙하자 2002-03-13 23:39:56 히5:11-6:2 오창우 2002-01-06 2002년도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해서 예배하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 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올 해 우리 교회는 교육의 해로 삼았습니다. 전도, 교육, 봉사 세 가지 주제 를 3년을 한텀으로 해 가지고 작년에는 전도, 올해는 교육에 힘쓰는 해로 정 하고 교회 표어는 "말씀 위에 든든히 서가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이 한해동 안 잘 배워서 성장하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해서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라고 부탁한 것처럼, 우리의 진보를 나타내자 그 말입니다. 이 한달 동안 교육에 관해 말씀 전하는데, 오늘 첫 시간으로 "영적으로 성숙하자"하는 이런 제목 하에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영적 어린아이 상태에서 벗어나라 영적으로 성숙하자하는 이 말은 먼저 영적 어린아이 상태에서 벗어나라 이말입니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하지를 못합니다. 이 아이가 영어를 배우고. 수학을 배우고, 하다 못해 천자문을 다 떼어도 스스로 하지 못하면 어린아이입니다. 어른은 다릅니다. 영어를 못해도 천자문을 안 떼어도 스스로 할 일을 압니다. 책임을 감수하는 것이지요. 영적으로 성숙하다고 하는 말은 이런 어린아이 스스로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책임있는 사람이 되라 그런 말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자랄 때 저희 집 벽에는 눈금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이들에게 `이리 와라` 하면 큰아이가 와서 이렇게 눈금이 그어진 것에 머리를 대고 줄을 긋습니다. 그리고 `야, 너 지난 번 보다 컸구나!` 한달 전에 잰 것과 지금 잰 것을 비교해서 써놓았어요. 오선영, 몇월, 몇일, 얼만큼 컸다. 그러면 작은애가 쫓아와서 자기도 해달라고 그래요. `그래, 너도 하자` 하고 `오대영, 너도 이렇게 컸구나!` 하고 날짜를 써놓아요. 아이가 크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부몬데, 부모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기뻐하는 것이에요. 우리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를 믿고 한 해가 되고, 두 해가 되면 자연히 우리의 영적인 성장의 눈금이 높아져 가야 되는 거예요. 만약 우리들 가운데 이런 눈금이 높아져 가지 아니하고 그냥 한 상태에 정지되어 있으면 이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크지 않을 때 얼마나 마음 아파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후에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 마음이 아픈 것이라 그 말이에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3장에 걸쳐서 이 땅에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 봤을 때,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어요.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가 있어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거듭났어요. 구원받았지만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세 번째는 신령한 사람이에요. 거듭났어요.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사는 사람이에요. 참그리스도인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육신에 속한 자가 문제란 말이에요. 구원은 받았지만은, 신앙생활은 한다고 하지만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육에 속한 자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어요. 아니 교회 안에도 미안하지만 보게 되면 불신자보다 더 못한 사람이 없지 않아 있어요. 이게 문제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어린아이 상태를 벗어나라 그럴 때 보면, 영어를 많이 하는 것이 어른이냐 아이냐의 기준이 안되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이 기준이 안돼요. 여러분이 잘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은사를 많이 받았어요. 방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병고침의 은사, 지혜의 은사 다 받았어요. 그런데 이 교회는 시끄러워요. 늘 분열이 있고, 다툼이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낸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여러 가지 많은 은사가 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너희에게 좋은 길을 보이리라`하고 하시면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세요. 가장 큰 은사가 무어냐? 사랑의 은사라고 하는 거예요. 사랑이 뭐예요? 주는 거예요,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라 그 말이에요. 은사 중의 제일 큰 은사는 무어냐? 사랑하는 은사라는 거예요. 여러분요, 영어 많이 안다고 어른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은사 많이 가졌다고 어른 아니에요. 방언 한다고 어른 아니에요. 분명히 기억하세요. 은사가 우리 신앙의 성장의 척도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예요. 교회 경력과도 관계가 없어요. 오늘 성경 말씀을 그대로 보게 되면,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때가 오래되었다, 교회경력, 이것도 신앙의 척도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에요. 그러므로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첫째는 성장을 사모해야 되요. 다시 말하면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기쁜 것은 성장 아니겠어요. 근데 이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 한참 놀고 있는데, `너 잠깐 와봐, 오 살았구나`하는 부모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살았나, 죽었나 이 문제 가지고 늘 갈등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소위 구원의 확신이 있냐? 없냐? 있냐? 이것 묻는 거예요. 그것 대단한 것처럼 생각해요. 난 구원의 확신이 있다. 난 하나님의 자녀다. 물론 자랑스러운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오늘 성경에 보게 되면, 6장 1,2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이런 말씀을 했어요. 그리스도 도의 초보, 죽은 행실을 회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세례, 안수, 부활, 영원한 심판, 이것은 뭐냐면요? 유대 주의의 근본원리예요. 오늘 히브리서에 보면요, 유대교인 가운데 개종해서 기독교인 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유대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게 뭐냐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자랑해요. 자기들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거 얼마나 자랑하는 몰라요. 책임은 없고, 자기들의 태어난 생명, 신분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들이 다시 거기로 돌아가려고 그래요. 그래서 하는 말이 그리스도 도의 초보라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야 된다는 것이 관심이에요.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우리의 관심은 뭐냐? 구원은 하나님이 우릴 위해 해주셨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생명 주셨어요. 부모가 자녀에게 생명을 주었어요. 그럼 그 아이의 사명은 뭐냐? 크는 게 중요한 거예요. 잘먹고 성장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맨날, `나 살았어? 죽었어?` 이렇게 물으면 그 아이는 정신적인 장애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 생명 내가 만든 것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는데,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생명 주셨다는데, 그것만 붙잡고 `내가 살았어요? 죽었어요?` `목사님, 내가 살았어요? 죽었어요?` 이런 얘기만 묻는다면 제가 잘못 가르쳤든지, 여러분이 어디 병이 들었든지 그렇단 말이에요. 우리가 가야 할 것은 성장이에요. 완전한 대로 나아가라는 거예요. 이런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기초, 생명의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 그 말이에요. 더 큰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말이에요. 초보자들은 그러기 때문에 자기 구원만 자랑해요. 어린아이들 보세요. 자기 집 자랑하거든요. `우리집 크다, 나 뭐 있다` 이거 자랑하거든요. 어리석은 신앙인들도 뭘 얘기하냐 하면 자기의 구원만 자랑하고 은사만 자랑해요. 어린아이들은 자기 가진 것만 자랑하지 제가 뭘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 안하는 거예요. 여러분,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뭘 가졌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은사 문제 다시 거론하는 대요. 은사는요, 신앙의 목표가 아니에요. 성장을 위한 수단이고 방편이에요. 저는 직분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제가 목사가 된 이유가 뭐냐? 여러 가지 이유 되지만 한가지는 분명해요. 내가 목사 안하면 신앙생활 잘 안할까봐 목사 준거예요. 내가 여러분보다 똑똑하고 잘나서 목사 된 거 아니에요. 내가 성품적으로 목사될 만해서 하나님 목사 맡기신 것 같지도 않아요. 내 생각이에요. 그래도 목사라도 하니까 예수 잘 믿고 이 책임 감당하려고 신앙 안에 바로 서는 것 같아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리석은 신앙인은 자기 직분을 자랑해요. 그러나 자기 책임은 자랑하지 않아요. 자기 책임 감당할 생각 안해요. 은사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은사가 목표가 아니에요. 은사를 줘야 예수 믿을 것 같으니까 은사를 주시는 거예요. 직분도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기도도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어린아이 기도는 늘 달라고만 그래요. `돈 주세요, 집 주세요, 차 주세요` 언제나 나 중심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했어요.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탄식함으로 우리에게 간구하시고 우리에게 기도할 제목도 주신다 그랬어요. 내 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성령이 내게 기도하게 하시는 게 중요해요. 성령이 나에게 뭘 가르치시겠어요? 오늘도 우리에게 책임을 감당케 하시는 그 기도의 제목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냥 내 생각만 해보세요. 부부지간에도 원망이 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만나서 요모양 요꼴이냐 그것밖에 더 되겠어요. 근데 자기 생각 밖에 안하거든요.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실 때 나에게 사명을 주시는 거예요. 내가 할 일 뭔지 알게 하고 이 고난이 왜 왔는지 알게 하고 이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영광을 드러낼까를 알게 하시는 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성경 공부도 마찬가지에요. 10년, 20년 성경 공부하면 무엇해요. 성경 공부하는 목적이 무언데, 삶에 적용하라는 것 아니겠어요. 수영을 배우는 사람이 수영 이론만 50년 배우면 수영할 줄 알아요? 물 속에 들어가야지...... 삶의 현장 속에서 말씀이 녹아지는 거예요. 그냥 나타나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말이죠 만원짜리 돈을 가지고 있다가도 과자주면 바꿔요? 안바꿔요? 바꿔요. 100번 바꿔요. 왜 그래요? 지각이 없어서 그래요. 무엇이 중요한지를 몰라서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고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은사보다는 이 은사를 통한 열매가 더 귀중한 것을 알아야 되요.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해요. 사랑을 구하는 게 아니고 은사를 구하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될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붙잡아서는 안돼요. 여기에 얽매여서는 안돼요. 살았냐? 죽었냐? 묻지 말잔 말이에요. 이제는 우리가 뭐냐? 딴 거 아니에요. 성장을 향해서, 성장을 사모하고, 우리가 더 큰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아이 상태를 벗어나는 두 번째는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율법의 지배를 벗어나라는 말은요, 누가 나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도하는 것을 더 이상 이런 주문은 하지 말란 말이에요.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에 흙을 잘 먹었대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어요? 맛있는 것도 많이 있을 텐데, 나가서 놀다가 흙을 그렇게 먹냔 말이에요. 그래서 엄마가 속상해 가지고 쫓아다녔대요. 왜? 흙 못먹게, 감시하는 거예요. 그런데 돌아보면 엄마는 그렇게만 한게 아니에요. 요즘에 아이들 클 때 보면 누구나 아이들을 감시해요. `이거해, 저거해, 하다못해 이빨닦아, 밥먹어, 잠자` 이거까지 얘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해야 그 아이들이 크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어떻게 보면 부모는 자식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 같아요. `이거해 저거해` 자기 생각이 없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그것을 노예라고 생각안해요. 왜? 사랑인줄 알기 때문에...... 그러나 나이가 사십이 넘어서도 엄마가 하라는대로 하면 그거 어디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성장한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율법의 지배를 벗어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지도하시고 인도하시는 말을 우리가 알고 그 안에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5장 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는 바가 되면 율법 안에 있지 아니하리라" 그랬어요. 내적인 생명이 발달되어 있어요. 그렇게 때문에 율법의 통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명령이나 규칙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조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 이상 `십일조 안하면 저주 받을 줄 알아라 주일성수 안하면 너는 죽을 줄 알아라` 이런 식으로 십일조 생활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지 억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어려서는 그렇게 해요. 그 렇게 가르쳐요. 그러나 이것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깨닫고 그 안에 살아가는 것이 성장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통제 받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고, 율법의 통제를 받는 사람은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이에요.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 그랬어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본문 14절에 있는 말씀처럼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 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로다" 그랬어요. 아이들에게는 연단된 지각이 없어요. 선악 분별할 수 없어요. 지난 번에 어느 집에 불이 나서 남매가 죽었잖아요. 알고 보니까 부모가 일하러 나갔는데, 그 사이 아이들끼리만 있다가 그만 불나서 죽고만 거예요. 왜 그래요? 지각이 없어서 그래요.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교리와 규칙의 지배만 받고 이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면 이것은 어린 거예요. 그러지 마세요. 규칙의 지배 그것 때문에 억지로 끌려가는 신앙생활 하지 말고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도와주심을 믿고 그 안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영적인 어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할 줄 안다는 거예요. 책임이 있는 거지요. 여러분, 부모가 된다고 하는 것은 책임이 있는 거거든요. 책임이 있는 사람이 어른이에요. 나이 스무살이 되었다고 어른이 된 거 아니에요. 책임이 있어야 해요. 지각도 있고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들이 어른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어른이 될려면 꼭 사춘기가 있더라구요. 독립하려고 하는 의지지요.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늘 목사님이 와서 기도해줘야 되고,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기도할 줄 알아야 돼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 사모해야 해요. 영적인 사춘기지요. 처음엔 어렵습니다. 독립하려고 하는 의지는 있지만 실패하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을 때, 무조건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래 해라 머리에 물들이고 싶어. 해라. 근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하자` 고등학교 3학년 마치는 날 엄마는 아이들 데려다가` 무슨 염색할래` 보라색, 빨간 색 다 들려 줬어요. 작은 아이도 똑같아요. 뭐 하고 싶다 그러면 `해라` 그러나 하나 조건이 있어요. 여기 까지만 해라 `남들은 다 늦게 들어가는데`, `안돼 너희는 9시까지 집에 들어와` 아이들은 잘 지켜 줬어요.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독립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합리적인 선이 있어야 해요. 약간의 지도가 있어야 되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하는 사람이 되야 되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 을 때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래요. 그 성령의 역사는 무어냐? 나를 가르치시는 거예요. 여러분, 요한1서 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친대로 주안에 거하라"그랬어요. 우리에게 이미 내적인 진보가 있어요. 성령의 역사가 있어요. 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가르치시는 거예요. 구약에도 성령의 역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3, 34절에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운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튼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된 자는 부모가 누구인지를 알아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장했을 때에는 스스로 할 일을 알아서 한다는 것이에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특별히 선악의 분별력, 해야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아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고 그랬어요. 고린도전서 6장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라 했고, 고린도전서 10장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이익을 구하라" 그랬어요.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되면 자신이 일을 해야 되요.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판단해서 해야 되요. 그리고 성숙한 자는 덕을 세우기 위해서 모든 자유를 잘 조절할 수 있는 통제 능력도 있는 것이라 말이에요. 이미 말씀드린대로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날 감시했어요. 가르쳤어요.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가 계셔도 나를 감시하지 않아요. 내가 성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내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써요. 사고 싶은 것도 사고, 가고 싶은 곳도 가고, 다 누릴 수 있어요. 감시자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 세상의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덕을 세우고 다 유익한 것은 아니에요. 난 알아요. 지각이 있어요.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향락에 굴복당하지 않아요. 부도덕한 짓을 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는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 살아가는 것을 기뻐해요. 분별력이에요. 성령이 나에게 주신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나는 내 책임을 질 수 있어서 스스로 온전하게 처신해갈 수 가 있어요.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어린아이로 가득차면 어떻게 되겠냐 그 말이에요. 무수한 감시자가 필요해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러나 성도들이 성장하면 안심할 수 있어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이것을 잘 감당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교회는 올해부터 많은 일들을 우리 교인에게 위임을 했어요. 우리 교역자들이 그전에 다하던 일들도 우리 일반 교인에게 많이 위임을 했어요. 스스로 해봐라 그 말이에요. 여러분, 일하는 축복을 저만 받으면 안되잖아요. 여러분도 받아야지요. 난 이일을 여러분이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잘 감당해야 해요. 그러나 교회 일을 할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고 덕이 아니에요, 유익한 게 아니에요.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해야 해요. 내생각대로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야 해요. 나 편한대로 하지 말고 교회의 유익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라 그 말이에요. 여러분, 아프리카의 선교사 가운데 리빙스턴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분이 아프리카에서 30년 동안 선교사 생활을 했어요. 얼마나 오래 했어요. 그래서 영국의 탐험가인 스텔리가 이 리빙스턴을 만났을 때 `30년 동안이나 헌신하시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헌신 그만하시고, 하나님도 다 알아주실 거 아닙니까? 그러니 이제는 여기 그만 두고 본국에 돌아가서 편히 쉬십시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리빙스턴 선교사가 이렇게 말을 했어요. `선교는 헌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보답입니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더니 리빙스턴 선교사가 이 말이 맘에 안들었던 모양이에요. `차라리, 이것은 헌신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 준 특권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내일을 기대하는 희망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리빙스턴 같은 생각과 감격 속에 충성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무슨 헌신한다구요? 내가 무슨 보답한다구요? 뭘 보답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보답이 아니에요. 이것은 나에게 맡겨지는 엄청난 특권이에요. 그리고 내일의 영광을 기대하는 놀라운 축복이요, 희망이라는 말이에요.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는 그런 일이란 그 말이에요. 누구를 보고 일하겠어요? 목사님보고? 아니에요. 장로님보고? 아니에요.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권이에요. 영광스러운 미래의 희망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 이 안에 들어있어요. 어떤 사명이던지, 여러분 가정에서 내게 준 특권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향한 여러분의 자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어른이 되란 말이에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오늘 주어진 이 일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권으로 알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희망이 여기 있는 줄 알고 일하는 거예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 나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권이에요. 내게 은혜 주시려고 이 자리 주신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책임 감당할 때, 있는 것만 줍니까? 아이들은 이해 못해요. 없는 것까지 다 해주는게 부모입니다. 우리가 이런 책임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누가 깨닫게 하는 거냐? 성령이 나에게 지각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악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 안에 살아가는 또 하나의 축복은 뭐냐? 우리 영혼이 보호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성장할 때, 마귀가 절대 건드리지 못해요. 우리가 주를 위해 충성할 때, 우리를 보호하심으로 마귀가 절대 침범하지 못해요. 내 영혼을 지키는 일이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돼요. 우리가 이런 믿음과 소망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충성할 때, 하나님 이 개인과 이 교회를 더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영적인 어른의 상태로, 스스로 하지 못하는 자가 스스로 할 수 있고, 달라달라 하는 자가 주를 위해 무엇을 드릴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고, 그리고 책임을 잘 감당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직장이, 이 민족이, 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축복받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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