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2002-02-16 11:35:09 (히브리서 12장1-3절) 2002년 2월 10일 인생은 경주장의 선수와 같다 요즘의 세상은 변하는 속도를 측정하기가 어려울 만큼 빠르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국제화와 속도화는 우리의 생활변화를 부추기는 두 가지 축입니다. 더구나 속도화에 있어서 전광석화와 같이 빨라지는 인터넷 정보사회는 누구든지 빨리 정보를 섭렵하게 하며 그 섭렵을 폭 넓게 종합적으로 속도 있게 잘하면 가장 앞서가는 자를 만듭니다. 더 이상 안일하게 인생을 살게 두지 않습니다. 엄청난 경쟁 속에서 우리는 모두 다 경쟁자요 경주자입니다. 잘 뛰는 사람이 이기도록 돼 있습니다. 과거에 느리고 평안하게 기존권을 누리며 여유 있게 살던 때가 차라리 그리운 때가 됐습니다. 유유자적이 참 인생의 멋이 있던 때가 엊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경쟁인생이 그것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뛰어야 이깁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에게는 승리를 만끽하는 기쁨이 언제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경영하는 신앙생활도 처음부터 경쟁이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최선으로 뛸 때 승리하였습니다. 종교생활이란 미명 하에 유유자적하며 악세사리로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잘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하고 풍성한 축복의 약속 성취는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렇기에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치고라도 뛰어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승리 그것은 우리 인생이 경주의 인생임을 아는데 있습니다. 무엇을 목표하고 살아가는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의 인생과 삶의 모양도 방법도 달라집니다. 무엇을 보고 자라는가? 무엇을 목표하고 살아가는가? 는 참으로 중요한,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데는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며 누구에게서 인생을 배우며, 무엇을 목표로 살아갑니까? 오늘 본문의 "바라본다"는 말은 사모한다, 존경한다 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흠모하자는 말씀이고, 닮자는 말씀이며, 그러기에 예수를 사모하는 자가 되자는 말씀입니다. 훌륭한 믿음의 경주자들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하여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에 대한 귀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 훌륭한 믿음의 경주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경주로 자주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라"(고전9:24, 갈2:2, 빌2:16, 3:12, 딤후4:7)고 표현하였습니다.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힘껏 달려서 골인지점에 이르듯이 우리들도 최선을 다하여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믿음의 경주자가 가져야 할 몇 가지 자세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경주자는 응원단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1절 상반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웅변은 청중에서 오고 좋은 경기는 관중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뜨겁게 호응하며 잘 들어주는 청중이 있을 때 훌륭한 웅변을 할 수 있습니다. 열렬히 응원하는 관중들이 있을 때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관중이 없는 운동장에서 뛸 때에는 신도 나지 않을 뿐더러 평소의 실력마저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들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지켜보고 응원하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많은 성도나 이웃들이 후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면서 우리들이 믿음의 경주를 잘 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경주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그 고통 중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또한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행전 7장 56절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자기를 지켜보시는 것을 보았을 때 스데반은 힘을 얻은 것입니다.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주님을 비롯한 많은 응원단들이 열심히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경주자는 예수님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2절 상반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경주자는 골인지점을 향해서 달려야 합니다. 아무리 잘 달려도 방향이 틀리면 안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시작하게 해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이 믿기 시작한 날부터 믿음의 경주는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향하여 달려야 합니까?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뛰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매일 같이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영국 해협을 헤엄쳐서 왕복한 수영선수 플로렌스 채드윅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후 1952년 7월 4일에 36세의 플로렌스는 로스엔젤레스에서 가까운 카타리나 섬에서부터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수영해서 가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이 선언은 미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그 광경을 전 지역에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도착 지점인 해변가에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16시간 동안 계속 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안개를 헤치고 사력을 다해 나아갔지만 자기의 힘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녀는 기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라오던 구조선에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배를 타고 해변에 도달하고 보니까 안개 때문에 안보였던 도착지점이 포기한 지점에서 불과 5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실패한 이유는 추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피곤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안개로 인해 목표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표가 이처럼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목표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그리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생각의 문제이다 교양서적 중에 리차드 칼슨이 쓴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한번쯤은 꼭 읽을만한 아주 유익한 교양서적입니다. 그가 이제 "생각의 집착을 버리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 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관점의 선택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꼭 같은 일을 놓고 어느 쪽을 생각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의 문제도 아니고 지위의 문제도 아니고 지식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생각의 문제입니다. 결코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낙천주의자가 되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밝게 생각하는 그런 생각의 성향을 가지게 되면 사람은 범사에 행복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계속 부정적이고 의심하고, 부정하고 의심하고, 부정하고 마지막에는 우울증에 빠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정신적으로 죽어지고 맙니다. 이 사람은 영영 구제 받을 수 없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행동은 있는데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어느 사이에 행동만 남고 생각은 빠져나갈 때가 있는데 그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이 먼저 가고 때로는 욕망이 먼저 가고 생각이 뒤따르면 그 일에는 계속 후회가 있습니다. 끝없는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이 먼저 가고 그리고 행동이 가서 생각한 바를 사건 속에서 행동 속에서 확증해 나갈 때에 그래서 때로는 더 높은 의미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 따로 간다면 사람은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말은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이 학술적 용어 속에서 사람의 사람 된 높은 가치는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이 생각하는 능력과 기능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있는 가장 귀중한 기능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정말 그런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분은 틈만 나면 그러셨지요. "생각만 하면 안 된다. 생각하는 생각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때는 반복되는 어감에 모두들 깔깔 웃었지만 지날수록 깊은 말이지요. 생각의 두 가지 유형 생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각하면서 자꾸 의심으로 발전하고 의심하는 쪽으로 계속 추리하게 됩니다. 생각이 의심 쪽으로, 의심하다보면 계속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되고 참으로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으로 이어지는 생각, 이런 유형을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 유형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생각하면서 믿어집니다. 생각하면서 믿음이 점점 깊어집니다. 이러한 것을 아브라함 타입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 그리고 "약속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자손을 주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가지만 사실은 여러 번 휘청거렸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주신다고 했는데도 흉년이 드니까 애굽으로 피난도 갔고, 자식을 주신다고 했는데 10년 20년 기다려 보다가 이게 도무지 안되니깐 그만 서자를 얻었는데 그것이 이스마엘 입니다. 이렇게 휘청거렸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생각을 고쳤습니다. 믿음을 더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과연 믿을 수 있다. 과연 그 능력과 지혜는 놀라운 것이고 나를 선택하신 경륜은 위대한 것이다." 계속 믿음을 확증해 나갑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생각이 그 믿음을 발전시켰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그 보다 더 강한 사람은 적을 친구로 만드는 사람이다. 가장 풍족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처지에서 만족하는 사람이다". "나는 만족하다. 나는 넘치도록 행복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제일 큰 부자입니다. 또한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남을 칭찬하는 사람이다." 칭찬하지 않고 칭찬 받는 사람 보았습니까? 여러분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까? 칭찬하는 쪽으로 계속 우리 생각이 발전해야 칭찬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또 멀리 생각할 줄 알아야 되고 그 마지막 궁극적 종말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미래를 생각하고, 오늘에 살지만 내일을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방향에서 생각하느냐. 흔히 말하는 대로 과거 지향적이냐 미래지향적이냐. 항상 우리는 과거를 생각합니까? 아니면 밝은 미래를 내다봅니까? 어느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또 하나는 집중력입니다. 생각이 건성으로 되어선 안되고 깊이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이 집중력이 부족하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자기가 가진 이 생각의 능력, 이 창조적 능력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집중이 인격이요 집중이 그 사람의 운명입니다. 얼마나 집중적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속성입니다. 한 두 번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평생, 계속 생각합니다. 이 집중 그리고 지속적 생각이 마지막에는 구멍을 뚫게 되고 저 미래를 향하여 큰 소망의 길을 열어 놓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다 알 수가 없고, 다 알 필요도 없고 다 가질 필요도 없고 또 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됩니다. 무엇이 우선적인가. 이 최우선! 절대 우선적인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집중적으로 생각하되 최우선적인 것을 생각하고, 또 하나는 유치한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여기서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각 자체를 생각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의 기능인 이성, 그 이성이 건강하냐 병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생각 자체를 생각해야 되요. 잘못 된 내 생각이, 병든 내 이성이 사고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타락한 이성, 타락한 생각, 타락한 생각의 기준, 이 병든 이성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내 생각이, 내 이성이 근본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을 때, 이것을 어떻게 개선해 보려고 어떻게 고쳐보려고, 어떻게 따라가 보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거기서는 밝을 미래를 창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로 명령을 하십니다. 이성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하라. 생각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춥니다. 마치 경기자가 푯대를 향해 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나를 보고 세상을 보아서는 세상을 모르고, 나를 보고 예수님을 보아도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나를 보아야 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옵니다. 나를 보고 아버지를 보면 부끄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보고 나를 보니까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 기뻐하는 아버지, 정신 없이 기뻐하는 그 아버지 얼굴을 보고 나를 보니 나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이제 복잡한 과거는 생각할 것 없고 다시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나를 보고, 예수님을 보고 나를 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 그는 능력이 많고 지혜도 있고 기회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를 안 질 수도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 왜 십자가를 져야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 말없이 서있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를 생각하는 순간에 세상에 억울한 게 뭐 있습니까? 십자가를 보시면 참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슨 변명이 그렇게 많고 무엇을 못 참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의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죄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사랑하셨다"고. 여러분, 하나님을 거역한 분이 한 두 분입니까? 얼마나 많은 동안 하나님을 거역했습니까? 양심을 거역했습니까? 불의의 길로 행했습니까 마는 하나님은 오래오래 참아주셨어요. 무던히도 참아주셔서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나를 참아주신 그분을 생각하십시오. 사랑이란 곧 믿음입니다. 나를 믿어 주었어요. 사랑은 참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불의를 참아 주셨어요. 사랑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래오래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돌아오기를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 주었습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입니다. 내 대신, 내가 죽어야 할 대신 그가 죽으시고, 내가 고난 당해야 될 것을 그가 당하시고, 내가 저주받아야 할 것을 그가 당하시고 대신 십자가를 지신 그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소중히 여겨서 내게 일을 맡기셨어요. 많은 은사를 주어서 오늘도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케리어의 법칙이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윌리스 H. 케리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성공을 하고 그가 성공한 비결을 요약해서 많은 사람에게 가르쳤는데 그 말이 바로 캐리어의 법칙이 되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법칙 첫째는 무엇을 위하여 내가 걱정을 하나?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목적의식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수용하라. 이 현실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수용하고 받아 들이라. 세 번째는 깊이 생각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침착하게 현실에서 열린 문을 찾으라. 무엇인가 길이 있으니 그런 개선방법을 생각하라 고 말합니다. 여자 마라톤의 안타까움 1995년 9월 초에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여자 마라톤 경기가 열렸습니다. 이 경기에 일본에서는 [고히카와]라는 대학생이 출전하였는데, 초반부터 아주 잘 달렸습니다. 그런 페이스대로 뛴다면 당연히 일등으로 골인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선두그룹에서 밀리지 않았고, 계속 1위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골인 지점 3Km를 앞에 두고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계속 뛰고 있는 채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몸은 여전히 뛰고 있는데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방향을 잃고 지그재그로 뛰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로 뛰어들기도 하고 또 뒤돌아 뛰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엠브란스로 실어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녀의 출발은 아주 좋았고 잘 뛰었지만 결승점에 다 와서 실패하였습니다. 다음날 신문에서는 "여자 마라톤의 안타까움"이라는 제목으로 전날 사건을 보도하였습니다. 여성으로 100리를 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출발도 좋고 장년의 나이에 승승장구하고 잘 나가는 것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끝까지 잘 달려야 하고 끝까지 좋아야 좋은 것입니다. 인생에도 출발점이 있고 결승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잘 달리고 있다고 해서 교만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끝까지 붙잡아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좀 어렵다고 해서 끝까지 어려운 것도 아니고, 지금 평안하다고 해서 다 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겸손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행동하고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생각 없이 살았습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후회와 절망과 낙담뿐입니까? 다시 생각하십시다. 이제라도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나를 생각하고 앞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할 나를 생각하십시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서 죽으실 뿐더러 내 운명을 책임지고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저 미래를 바라보면서 마지막을 전망하십시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생각하고 그리하는 동안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올 것입니다. 생각이 거듭나고야 새로운 운명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아픔과 고난이,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슬픔과 눈물이, 여러분이 지금 가고 있는 힘들고 고된 길이. 여러분이 지금 드리는 기도가, 여러분이 가고 있는 이 힘든 길이 먼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이 되고, 이 세상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 평화를 준다면, 누군가가 여러분이 걸어갔던 고된 길 때문에 기쁘게 걸어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아픔과 고난이 이 세상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랑이 된다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슬픔과 눈물이 이 세상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당신이 지금 가고 있는 슬픔과 눈물이 이 세상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당신이 지금 가고 있는 고된 길이 이 세상 누군가에게 등불이 된다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당신이 지금 드리는 기도가 이 세상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 평화를 준다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당신이 가고 있는 이 힘든 길을 먼 훗날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걸어갈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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