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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신 새 계명
2002-01-30 12:43:35

요한복음 13 : 31-35 (2001년 4월 1일)


요 13: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요 13: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요 13: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미국의 예방의학 권위자인 피터 한센이라는 사람은 " 사람이 건강하려면 몇 가지 조심할 것이 있는데 첫째는 적당한 음식을 먹어야 하고, 둘째는 적당하게 운동을 해야 하고, 세 번째는 나쁜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고 했습니다.
" 담배 술 화내는 것 게으름 피우는 것 이런 것들 나쁜 습관을 과감하게 버러야 한다. 그러면 건강하다. " 이거 대단히 상식적인 이야기요,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 이것은 50%이고, 나머지 50%는 사랑 " 이라 그랬어요.
"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해야 건강하다 " 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 이웃 사랑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건강상 문제다. "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랑을 하나의 계명으로 말씀합니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계명이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드시 지켜야만 되는 주님의 절대명령입니다. 건강하냐 건강하지 못하냐? 행복하냐 불행하냐의 차원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명에 관한 문제라는 말입니다. 왜 주님은 이 사랑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셨는가?

말씀하신 그 때
그 의미를 알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주님은 유언처럼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다음에 마지막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한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때,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만찬을 할 때 예수님의 마음을 끊임없이 아프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사로의 집에서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에게 부어 드릴 때부터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보다는 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주님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이 위대한 것은 그것을 들추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말속에 음흉한 흉계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를 인정합니다. 유다야 " 그래 네 말처럼 가난한 자는 항상 있단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지 못하단다. " 그의 말을 인정해주었고 다시 한번 유다로 하여금 주님을 섬길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13장으로 넘어가서 주님은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제자들의 발 밑에 내려가서 그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의 발이 씻김을 받을 때도 그는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발 씻김을 통해서 그가 회개할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주님은 유다의 발을 씻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크리소스톰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유다의 발을 가장 먼저 씻겨드렸다고 합니다. 발을 씻기면서도 주님의 마음은 유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황송하게도 주님의 섬김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바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씀이 "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하였으나 다는 아니니라. " 바로 가룟 유다를 두고 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 성만찬을 하게 됩니다. 성만찬을 할 때도 주님은 자신을 팔 가룟 유다에게 빵 조각을 찍어서 손수 입에 넣어줍니다. 이것은 사랑과 정성을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회개할 것을 또 한번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밤에 다락방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강을 건너가 버렸습니다. 회개의 기회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하여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할 그 때까지 완전히 어둠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은 관원들에게 체포되고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되는 그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 사건이 확정되었습니다. 12시간이 지나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도록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영광을 얻은 주님
그런데 바로 그 때 주님은 말씀합니다. 31절입니다.
"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
이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데, 죽임이 다가오는데, 십자가가 오고 있는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열두시 간쯤 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죽음이 있습니다. 억울하고, 비참하고, 도대체 역사상 가장 비참하다고 하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걸 아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환성을 발합니다.

"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
영광을 얻을 것이다가 아니라 영광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영광을 얻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유다의 계략을 알고도 끝까지 인내했고 그를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로 말미암은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쪽에 서게 됨으로 영광을 얻었고, 아버지도 아들의 그 행위로 인하여 영광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거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 속에 음흉한 흉계가 있는 것을 알아요. 그것 알고 인내하는 것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혹시 좀 성숙한 사람이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나를 죽이려하는 저 사람을 내가 사랑한다는 것, 계속해서 기회를 주고 인내하고 사랑한다는 것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이 그렇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까? 내 힘으로는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됨을 말입니다.
그래서 외치는 것입니다. " 아 내가 영광을 얻었다. 아버지도 나로 인하여 영광을 얻었다. "
영광은, 다른 말로 칭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수에 대해서는 인내에 있고, 자기 희생에 있고, 하나님에게는 순종에 있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끝까지 사랑하고, 절대로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곳에 자신의 영광이 있습니다. 세상에 출세했고, 성공했다고 그 분에게 영광, 칭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부러움이 있을 뿐이지 영광은 없습니다. 영광은 희생과 사랑과 순종 속에만 있습니다.
주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유다 와의 전쟁에서 사랑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유다를 향해서 한번이라도 이 ' 괘씸한 놈 ' 이라고 화를 내며 그를 저주하였더라면, ' 나쁜 놈 ' 이라고 분노를 발하였다면 주님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인내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외칩니다.
" 내가 영광을 얻었고 아버지도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었도다. "

영광을 얻으리라.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 영광을 얻었도다 " 라고 외친 후에 32절에는 " 하나님이 영광을 주시리라. " 라고 앞으로 얻게 될 영광을 미래형으로 말합니다.
"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
주님은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면서 그 다음에 있을 찬란한 영광을 미리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곧 승리요, 부활의 과정이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성을 발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
마샤 카터라고 하는 할머니가 있는 데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 삶도 명랑하게 아름답게 살았고 또 삶의 절정인 죽음을 가장 아름답게 스스로 장식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유서를 통해서 모든 손님들에게, 자기에게 올 손님들에게 절대로 상복은 입지말고 화사한 옷을 입으라고, 절대로 그 날 슬픈 이야기나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고, 아주 밝은 노래, 기쁜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만장하게 웃음을 웃어가면서 아름답고 경쾌한 프로그램으로 장례식을 지내달라고 목사님께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인의 편지가 낭독됩니다.
"지금까지 저는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제게 베풀어준 모든 고마운 분들에게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문 앞에 죽음이 얼른거리면 저는 따라나설 겁니다. 춤 신발을 바꾸어 신고 훌 쩍 떠날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사랑을 띄우며 마샤."

이렇게 세상을 떠났고 그 장례식은 그야말로 굉장한 음악회요, 굉장한 축제로 그렇게 치루 어졌습니다. 여러분! 이게 남의 나라 얘기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교육계의 지도자로 높이 존경을 받던 김활란 박사님. 그가 세상 떠날 때, " 내 장례식에 장송곡을 부르지 마라! 음악회와 같이 축제와 같이 지내다오.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마라! "
그래서 그 장례식은 훌륭한 음악회로 그렇게 치러졌다고 합니다. 죽음을 축제로 맞이할 수 있는 그 저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부활의 관문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인 것을 미리 보았고, 영광을 얻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이 앞에 있지만 죽음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을 영광을 생각합니다. " 영광을 주시리라. " 받을 영광을 생각하며 죽음의 쓴잔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지만 문제는 주님이 더 이상 이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땅에서 구속의 사역을 다 완성하시고 주님은 곧 하늘로 옮겨집니다. 주님이 하늘로 옮겨져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하는 동안 문제는 이제 역사적인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주님을 전하고 싶고 증거하고 싶어도 증거 할 주님이 계시지 않는단 말입니다.

무엇으로 주님을 보여주고, 주님을 믿는 사람됨을 무엇으로 증거 한다는 말입니까? 주님은 그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이 계신 증거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보고 주님을 믿으십시오' , 라고 아주 강하게 웅변처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절대로 사랑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경쟁의 공동체도 아니고, 지식의 공동체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입니다. 어떤 수준의 사랑입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의 수준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입니다. 끝까지 하는 사랑, 책임지는 사랑, 나를 버리면서 까지도 사랑하는 그 사랑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감동이 메말랐다고 합니다. 그 말은 사랑이 메말랐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곳에는 감동이 있고 감동이 있는 곳에 사람들은 몰려듭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고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작은 그룹, 순이라는 목장을 주셨습니다. 민족을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인류를 사랑한다는 말 사실 너무 황당한 말입니다. 어떻게 인류를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니라." 지금 옆에 있는 작은 지체, 순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한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수많은 빈민들을 구제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한 저물어 가는 금세기의 마지막 신화로 불리우는 알바니아 태생의 테레사 수녀는 처음에 인도의 캘커타의 작은 빈민촌에서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 한 사람을 사랑하고자하는 마음으로 영혼을 돌보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돌봄을 받았습니다. 세계 각 국에 그녀가 세운 선교회가 조직되었고 그곳에 봉사하는 수녀만 해도 4천 여 명이 넘습니다. 그녀가 테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던 날 한 기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 세계평화를 위해 가장 긴급한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테레사 수녀는 웃으면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기자 선생께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셔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일입니다."
세계 평화는 가장가까이 있는 한 영혼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합니다. 지금 옆에 있는, 가장가까이 있는 지체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그 사랑을 할 수 있더냐 ?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보통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수준의 사랑을 요구합니다. 헬라인들은 사랑을 네 가지로 분류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이성간의 사랑을 에로스라고 하고, 형제간의 사랑,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사랑을 필레오라고 하고 혈통적인 사랑을 스톨게 라고 합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공동체의 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랑은 혈통적인 사랑도 아니고, 필리아의 사랑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요, 진노의 대상인 나를 대신 죄 값을 죽음으로 담당하시고 사랑하신 그 아가페 적인 사랑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과연 그 사랑을 할 수 있더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분명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십자가의 사랑이 내게 각인이 되고 구체적으로 경험된 구원받은 사람만이 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고 하는 사랑,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의 사랑은 사랑의 모조품이지 참된 사랑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해서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을 내가 받았고 경험했고 그래서 내 마음속에 항상 그 은혜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그 사람이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 때문에 고생 많이 하는 어떤 교회의 권사님이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자녀가 셋인데 하나같이 재수, 삼수요. 그러고도 떨어져요. 아 그래 뭐 정말로 어떻게 학교를 제대로 딱 들어간다든가 하는 것은 그 집안엔 없어요. 그렇게 아이들이 참 공부를 잘 못하고 어려운데, 그래서 만나면 위로할 말도 참 드리기가 어려워요. 그랬는데, 아무 때 보아도 이 권사님은 얼굴이 밝아요. 환해요. 너무너무 밝아요. 그 것이 알고 싶어요. 도대체 아이들이 이렇게 못났는데 왜 어머니는 이렇게 늘 밝으냐 이거예요. 그걸 알 고 싶잖아요. 그래 한 번 물었어요.
"권사님! 참 걱정거리가 많아 보이는데 어떻게 그렇게 밝으십니까?"
"그거요? 아니에요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요 저를 엄청나게 사랑했거든요. 제가 제들만 했을 때요. 제가 보통 말썽을 부린게 아니 에요. 제들은 그래도 집은 안 나가요. 나는 들락날락 했어요. 그러나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절대 저를 나무라지 않았어요. 실망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뜨겁게 저를 사랑해 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데 비해서는,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랑 받은 데 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들 옛날에 가난하고 어려운 때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목숨보다 더 사랑했어요. 대신 죽는다면 당장 죽으실 분들이에요. 그 사랑을 받았기에 그분도 자식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내가 받았다는 이 생생한 느낌과 감동이 오고 있습니까?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기 전에, 자녀를 사랑하기 전에, 형제를 사랑하고, 순원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이 감동이 와야 됩니다. 수직적인 사랑을 받아야 수평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은 아는데 그것이 나의 것이 되지 못하다 그 말입니다. 왜 그럴까? 사도 바울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희에게 부은바 됨이니 " 성령이 임해야 그리스도의 사랑이 네게 부은다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예수님은 그 사랑의 화신이시고, 성령님은 그 사랑의 영이시고, 성경은 그 사랑의 편지라 그랬어요.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 깊이 깊이 임재 하고 역사 할 때 주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 내게 구체적으로 경험되어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점검할 것이 있어요. 내가 지금 성령 충만한가? 성령님에게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있는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가? 기도하는데 성령 안에서 하고 있는가? 봉사를 습관이나 종교심이나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고 있는가? 예배를 성령 안에서 드리고 있으며, 말씀을 성령 안에서 읽고 듣고 지키고 있는가?
성령이 여러분 안에 충만함으로 십자가의 사랑이 뜨겁게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의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뭡니까?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는 죄인을 사랑한 겁니다. 절대로 의인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인을 골라서 사랑한다고 하다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애당초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요. 원수 같은 자를 그대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어요. 그의 사랑은 감상이 아닙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철저한 의지였습니다. 사랑 그대로가 행동이었습니다. 액션입니다. 어떤 행동입니까? 값을 그가 대신 지불합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가 받습니다. 내가 값을 지불해야 할 것을 그가 지불하십니다.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사랑, 대속 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여러분은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네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것은 율법입니다. 아주 신앙의 초보의 수준입니다. ' 내가 어떻게 대하든지 상관없이 나는 너를 사랑하겠노라. ' 이거 굉장한 사랑 같지만 사실은 독선입니다. ' 또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 좋은 맘 같지요. 그러나 이것은 집착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나도 너를 사랑 할 것이다. 이것만이 신앙적인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오직 "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너를 사랑하겠노라." 여기에만 참 사랑이 있고 사랑의 진리가 있고 사랑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명문 대학인 스탠포드 대학이 있습니다. 이 학교를 설립하신 로렌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 는 켈리포니아 출신의 상원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부자요 상원의원으로서 명예를 겸하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낙심하게 됩니다.
"이 제 살 목적을 잃어버렸다." 하고 슬퍼하게 됩니다. 이렇게 슬픔을 당 한 그 날 밤에 그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 아버지, 이 세상에는 아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내 대신 저들을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꿈에서 깼습니다. 굳게 결심하고 재산을 다 털어서 스탠포드 라고 하는 유명한 대학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유서 가운데도 내 남은 재산 하나도 남김 없이 이 젊은이들을 위해서 써 달라고 부탁하고 세상 을 떠납니다. 그는 진정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였습니다.

여러분! 내가 사랑 받은 대로 남을 사랑하겠다는 겁니까? 사랑 받기 위해서 사랑하겠다는 겁니까?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을 때 사랑하겠다는 겁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이 그런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저히 사랑 받을 수 없는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을 담아 나의 모든 이해관계를 떠나서 지금 가까이 있는 작은 지체, 보이는 형제, 사랑에 목말라하는 순원들을 사랑해보십시오. 거기에 감동이 있고, 천국이 있고,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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