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구하는 자의 삶의 모습
2002-01-29 13:27:42

에베소서 5:15 ~ 20 2002. 1. 13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앙 생활 가운데 한 가지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 행위에 올바른 것과 그른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늘 드리는 이 예배에도 올바른 예배가 있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예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가인의 예배는 올바르지 않았고, 아벨의 예배가 옳았습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만 열납하시고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어려움입니다.


우리가 똑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똑같이 교회에 나와 기도와 헌금과 신앙 생활을 하지만,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졌는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10년, 20년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하는 예배를 우리가 드릴 수도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에도 올바른 기도가 있고, 올바르지 못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올바른 기도이고, 무엇이 올바르지 못한 기도일까요?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가장 확연하게 구분 짓는 기준은 바로 "삶의 변화" 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올바른 기도 생활을 하면 우리의 삶이 바뀐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아뢰는 것! 이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기도입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자꾸 만나다 보면 우리의 소원을 아뢰기보다 나중에는 내가 바뀝니다. 신기하지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도의 사람은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가 마음에 소원이 있었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국가를 위해 도저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던 상황이었어요. 나라가 영적, 국가적,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당했어요. 이대로 두면 우리 민족이 망할 것 같아서, 이 국가를 다시 살리기 위한 소원을 가지고 성전 앞에 나아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이사야는 자기의 소원을 아뢰기도 전에 자기를 바라보게 되었어요. 백성들이 위기를 당하는 것이 백성들의 잘못이고, 자기의 잘못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는 선지자였고,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러 나아갔어요. 자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그 순간, 이사야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부르짖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 나는 문둥병자와 같이 부정한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뵈올꼬!"라고 한탄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스랍(천사 중 가장 높은 계급)가운데 한 천사를 보내어 이사야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도 이사야는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지 못했어요.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얘기합니다. 깊이 기도를 하면 내가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겁니다.
그때까지도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탄식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사야는 자기의 소원은 간 곳 없이 "하나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외칩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 깊이 대화를 나누면 서로 닮습니다. 인격자와 많은 시간을 나누고 그와 얘기를 하다 보면, 그의 말투와 인격도 닮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도'에 대한 아홉 가지 단어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프로쉬케'라는 단어는 내 소원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나를 조율하는 작업입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을 데리고 나아가 그 거룩하심 속에 나를 조율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기도는 평생 드려도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새벽기도, 철야기도 해도 삶의 변화가 없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르지 못한 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기도는 당연히 삶이 변화되지 않는데, 이유는 그 목적이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주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욕심만을 이루기 위해 드리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엄격히 말해 하나의 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 이런 주문식 기도를 드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주문식 기도 - 무엇을 얻기 위한 예배 - 를 드리게 되면 우리의 삶도 바뀌지 않고, 우리 마음속의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2002년 한 해 동안, 아니 평생 동안 붙잡고 기도해야 할 중요한 기도 제목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복 주시옵소서! 내 지경을 넓혀 주시고,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환난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드리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축복해주세요!"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기도가 어떻게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있는가 입니다. 어떻게 하면 복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응답 받는 기도가 될 수 있겠는가? 저는 이 중요한 문제를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정말 복을 구한다면, 복을 구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의 삶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삶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복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까? 먼저 복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는 올바른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삶을 살아야 한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1.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15절)


여기에 보면 지혜 없는 자와 지혜 있는 자가 있고, 17절에는 어리석은 자가 등장합니다. 지혜라는 말을 이렇게도 표현하는데, 대학을 졸업했느냐,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가졌느냐,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지혜란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언제나 우리의 삶과 관계가 있습니다. 남편, 아내, 부모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사장과 고용인으로서... 내가 어떻게 행할 것을 아는 것, 그것을 성경은 지혜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주의하여'라고 했습니다. '주의한다'는 말 자체가 우리에게 경각심을 드러내는 단어인데,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하나님은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특별히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버리셨어요. 그 희생, 그 대가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며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세상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응접실이나 현관을 쓰는 빗자루를 안방 장롱 안에 잘 간수하고 있는 분은 없을 겁니다. 왜? 빗자루는 귀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다이아몬드 반지라면 끼지 않을 때 함에다 넣어서 안전한 금고에 보관할 것입니다. 귀중하기 때문이지요.
여자들에게 여러 가지 귀중한 것이 있지만, 아마 화장은 생명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화장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지요? 30분이고, 1시간이고 거울 앞에 앉아 있어요. 그것도 매일 말입니다. 화장할 때 몇 초만에 끝내지는 않습니다. 루즈를 정성껏 바르며 온갖 신경을 다 씁니다. 왜냐하면 화장이 중요하니까요.


하물며 인생이겠습니까? 구원받은 우리의 삶이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막살 수 있는 겁니까? 왜 인생이 불행해집니까? 왜 구원받았는데, 우리의 가정과 부부사이는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지 않는 겁니까?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으면서도 내가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마구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참으로 나에게 복을 구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너희 인생 가운데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있다. 앞으로는 지혜 있는 삶을 살아라!"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자세하게 주의하며 살아가거라!"
말 한 마디를 해도, 사람을 만나도, 돈 한 푼을 써도...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이것만으로 부족하여 지혜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권면하십니다. 어떻게 살 것을 주의해서 사는 사람의 삶의 특징 두 가지를 소개해 주십니다.

1) 세월을 아끼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6절)

지혜 있는 자의 삶의 특징은 세월을 아낍니다. 세월을 아낀다, '엑사고라조'라는 단어는 상업적인 용어입니다. 그 당시 시장에서 통용되는 용어였어요. 예를 들면, 시장에 갔는데 굉장히 싱싱한 갈치가 너 댓 마리 남아있는 겁니다. 너무나 귀해서 다른 사람이 사기 전에 모두 샀어요. 떨이를 한 거죠. 이때의 '다 산다'라는 단어가 바로 엑사그라조! '아낀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여기에 적용해 보면 '다 산다' 즉 '세월을 최대한 이용한다'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 일정합니다. 자원이 일정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돈과 건강과 지위, 이 모든 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 그것을 통해 최대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을 '세월을 아낀다(엑사고라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내게 찾아온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최대한 선용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왜 세월을 최대한 이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까?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악하니라!' 이 때는 어떤 때인가 하면, 할 수만 있으면 사탄이 눈에 보이지 않게 저와 여러분의 세월과 자원, 건강과 재능, 지위와 물질, 모든 것을 악한 일에 사용하도록 유혹하는 시대라는 겁니다. 정보통신부 장 ·차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최대한 영광 돌리고, 국민들 앞에 유익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이용해 뇌물을 받으니까 재판 받고, 감옥 가고, 집안 망신당하고, 너 죽고 나 죽었어요. 이런 일들이 오늘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위를 살펴보세요. 시간과 자원과 물질을 빼앗기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서면과 남포동을 나가보세요. 한국 같이 술집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잠시 한눈 팔면 우리의 자원들을 다른 곳으로 빼앗아 갈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잘못된 유흥업소와 이발소, 수없이 많은 쾌락을 즐길 수 있는 것들...
컴퓨터를 켜 보면, 오늘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악한 세대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끔 이-메일을 체크하기 위해 컴퓨터를 열어 보았을 때, 아주 점잖아 보이는 메일을 클릭했는데, 여자의 알몸이 그대로 뜹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당하는 세대입니다. 악한 세대입니다. 이 마수에 걸려들어 구원받았지만, 그의 자원과 세월을 낭비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이 단어를 '리딤'이라고 표기했어요. '너의 세월을 구속하라, 건져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지혜로운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월과 자원을 악한 일로부터 건져내는 특징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들이 여러분 안에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악한 일에 자원을 사용하지 않도록, 여러분의 자녀가 악한 일에 시간을 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 받는 일에 자기의 세월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혜 있는 삶을 사는가, 삶을 자세히 주의하며 사는가를 알고 싶다면 거꾸로 질문해 보세요.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기회들을 당신은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돈만 생기면 쾌락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조금만 시간이 나도 엉뚱한 데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혜 없는 사람이요, 삶을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일에서 돌이키기 위해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영안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7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부정적으로 표현했어요.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이 사업을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자신이 기도하다가 고민이 되면 흔히 목회자를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저 굴속에 담긴 비밀항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계시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만약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보셔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명확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을 상담했는데 "목사님, 저의 시어머니가 평생 저를 괴롭혔는데 예수 믿고 나서도 또 괴롭힙니다. 제가 올해 세 번이나 참고 기도했습니다. 삼 세 번은 참으리라! 그런데 네번째 저에게 아주 나쁜 일을 했는데, 참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한판 할까요?"
여러분, 이런 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에게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지혜롭게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복을 구하는 그 기도가 막힘이 없이 내 삶과 가정에 다 임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뜻과 지혜는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왜 못 깨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성경을 보는 자들은 너무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2.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8절)

짧은 절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술 취하는 것'과 '성령 충만한 것'을 대조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해할까 봐, 확연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두 구절을 비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이 구절을 가슴에 잘 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만큼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오해합니다. 대표적인 오해가 밧데리 충전형입니다. 이 형은 성령님의 능력을 내가 얼마만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새벽기도 나갔더니, 성령님이 나에게 배만큼 찼어요. 유명한 강사가 오는 부흥회에 쫓아다녔더니, 목까지 찼어요. 그리고 산기도 가서 아주 신령한 원장님을 만나 안수기도를 딱 받는 순간, 성령님이 머리끝까지 찼어요. 그러면 "이제 나도 해야지!" 하면서 그냥 아무나 붙잡고 안수하는 겁니다. "내년 오월에 시집가겠네!" 하면서 예언의 은사, 무슨 은사,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성령 충만으로 압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오해를 할까 봐 하나님께서 술 취하는 것과 성령 충만한 것을 비유해 주십니다.
술을 마시면 술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필름이 끊긴다고 하죠. 성령 충만이란, 내가 성령님의 능력을 얼마나 많이 가져오느냐가 아닙니다.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됩니다. 성령 충만이란, 내가 얼마나 성령님의 지배하에 들어가는가 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술 취함의 비유를 든 것입니다. 내가 성령님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내 의지와 말, 시간 사용과 돈의 사용, 내 생활의 모든 것을 함에 있어 성령님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제 숙부님은 시골의 한 교회에서 목회 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시고 그 옆에 집을 구해 살고 계십니다. 제가 1년에 몇 번 방문하면 말씀을 많이 안 하세요. 기도 생활을 많이 하시는 분입니다. 늘 저에게 한 두 마디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이 제 마음속에 몇 개월 또는 몇 년을 갈 때가 있어요. 지난번에 갔을 때도 차에 까지 따라나오셔서 저의 손을 가슴에 당기더니 말씀하셨어요. "박 목사, 성령님께 길들임을 받아!"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그 말씀이 제 마음에 남아 있었어요. 저는 성령 충만을 그렇게 정확한 단어로 표현한 신학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내가 얼마나 성령님을 많이 가졌느냐, 얼마나 많은 은사를 받고 능력을 행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성령님의 지배하에 들어가는가, 성령님께 길들임을 받는가, 이 문제인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성령 충만을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성령 충만이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셨어요. 시제를 보니 현재 명령형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 충만에 대해 5년 전 얘기를 합니다. 부흥회 때 은혜 받은 얘기, 그때 내가 많은 헌금을 했던 얘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이란, 매일 매순간 계속해서 받아야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계속해서 매일 매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님께 매일 지배를 받고, 성령님께 길들임을 받을 때에 우리의 삶은 바뀌고, 하나님을 향한 "주님, 나를 복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우리에게 응답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께 길들여지고, 지배를 받고, 성령 충만을 받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 다음 세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헬라어를 살펴보면 '성령 충만을 받으라'하는 명령형의 동사 다음에, 아주 아름답게 19절과 20절에 세 개의 분사동사가 나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19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고 하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 같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도간의 교제를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첫 번째 나타나는 증거가 성도간에 거룩한 교제가 있다는 겁니다. 교인끼리 만났다고 다 거룩한 교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도끼리 만나서 계모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만나서 남의 흉보고, 어느 집사 잘못된 것 얘기하고...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아니며, 성령 충만한 교제가 아닙니다. 또 어떤 분들은 만나면 성경책 펴드는 사람이 있어요. 다른 얘기를 못합니다. 그저 믿음이요, 기도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제일 겁납니다.
우리가 만나면 정치 얘기할 수 있고, 즐겁게 조크(Joke)할 수 있고, 취미생활 얘기할 수 있고, 스포츠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만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아버지 하나님, 저 형제가 요즘 낙심해 있습니다. 내가 저 형제와 두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 형제가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대화를 주장해 주십시오!"
남을 흉보는 얘기가 아니라, 세상 얘기를 하다가도 우리 마음 중심의 한 마디를 통해 서로에게 교훈을 받아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만남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을 서로 화답하는 교제라고 하며, 또한 성령 충만함 받은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교제가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19절)

'주께'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예배 가운데 감격이 있어집니다. '조' 집사(조는 분)와 '주' 집사(주무시는 분)님들, 가끔 졸 수 있습니다. 이번 안식년에 미국 내(內) 10개 정도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많은 유익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시차 때문이었는지, 설교 시간에 잠시 졸았어요. 그러고 나서 제가 이해를 했어요.
'설교 시간에 졸 수도 있구나!' 그런데 날마다 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찬양을 해도 어떤 분들은 감동이 있어요. 어떤 분들은 "박 목사 참 입도 크다! 뭐 한다고 저리 고함을 지르나, 살살 불러도 될텐데!" 그러면서 입을 딱 닫고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런 분들이 교회는 계속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적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배에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어느 순간 움직이세요. 찬양 가운데 함께 하시고, 그 예배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십니다.
예배는 이런 공적 예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예배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운전을 하면서도, 어느 날 내 마음속에 찬양이 넘쳐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싶은 겁니다. 이것을 깨달은 찬송가 작사자(W.P Cornell)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그는 이 체험을 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예배가 부흥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산길을 거닐다가, 바다를 쳐다보다가... 저는 부족하지만 그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제가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 부산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안남 공원의 돌 하나까지 다 압니다. 다대포, 몰운대, 장산, 부산의 유명한 곳을 다니며 운동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몰려들 때가 있어요. 울기도 하고, 기도도 하고, 노래도 합니다.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예배가 회복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0절)

감사가 있습니다. 불평과 성령 충만은 병행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감사가 넘쳐나게 됩니다. 우리 부부에게 한 가지 기도 제목이 있었는데, 부족한 우리 인생을 통해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안식년 들어갈 때도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만나게 해 주셨어요.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가정입니다. 그 어머니는 한국에서 제일 큰 불교 상점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은 많은데 자기의 재산을 털어 전국의 스님들을 모시고 불교 예배를 드렸어요. 그는 명문대를 나와 미국에 유학 와서 잠깐 취직 생활을 하는 아주 탁월한 가정이었어요. 이 분이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어요. 하나님을 알고 싶어했어요.
제가 성경공부를 위해 세 번만 만나자고 했어요. 그 집 부부와 저희 부부, 이렇게 두 가정이 저녁에 세 번 성경 공부를 했어요. 마지막 세 번째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두 번째 성경 공부하고 난 다음날 아침 일찍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큰일났어요." "왜요?" "우리 남편이 이상해졌어요." "어떻게 이상해 졌는데요?"
그 남편이 새벽 2시쯤에 잠이 깨서 "여보, 내가 이상해! 내 몸이 이상해! 내 마음이 이상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만나보았더니, 잠이 깼는데 저와 성경 공부한 그 모든 사실이 마음에 다 믿어지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몸이 이상해지면서 한 가지 특징을 얘기하는데,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사건과 사람들이 감사하게 보이더라는 겁니다. 자기의 부인, 자기가 살아있는 것, 심지어 꽃을 보아도 감사하더라는 겁니다. 저는 그 영혼이 그 밤에 구원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것을 알았어요. 그 가정이 천국이 되어 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신앙생활 10년, 20년 하는 동안 이 성령 충만은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을 근심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해서 우리 삶을 주의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삽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함을 오늘 다시 한 번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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