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간 두 제자 2002-01-09 12:39:41 눅 24:13-35 /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 24:13-35) 인생살이에서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실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의 감정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그 고통을 어떻게 삭이셨습니까? 여기 몹시 실망하다 못해 절망한 두 사람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는 조그만 마을을 향해 가는 아마 작은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즈음 되어진 일들을 나누면서 자신들의 속상함을 서로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그들 외에 한 분이 그들과 같이 갔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얘기하고 있는 그 예수가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실망하고 낙심할 일이 아닌데 이들의 실망과 절망이 깊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실망한 이유는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특히 자매님들의 머리모양이 바뀌면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물론 제 아내는 알아보지만, 제 아내도 머리모양 바뀐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전혀 기대하지 않던 곳에서 한 성도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안식년을 지내고 자동차로 뉴욕을 거쳐 시카고를 향해 가는데 표지판을 보니 나이아가라 폭포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점심식사나 하자하고는 차를 몰아 갔습니다. 언젠가 제 아이들과 나이아가라에 갔을 때 날씨가 너무 추워 배를 타고 둘러보지 못한 적이 있어서 간 김에 크루즈 코스 티켓을 끊어 들어가는데 한 자매님이 제게 반갑게 뛰어와서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 오셨는지 또 어디서 오셨는지를 한참 물으니 '목사님, 제가 남서울교회 집사예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보니까 제가 아는 분이었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만나는 바람에 알아보지 못한 경우였습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가 작년 코스타(해외 유학생 수련회)를 마친 후 제 아이들 집에 가서 한 열흘 동안 귀찮아서 수염을 깍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식사하려고 어느 식당 앞에서 차에서 내리는데 지나가던 분이 '어! 홍목사 같은 사람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이렇게 곁에 있어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들이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된 지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관원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의 기대는 그 말씀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며 바람과 바다를 말씀 한 마디로 잠잠케 하셨고, 거대한 바람으로 홍해를 가르신 분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은 물위를 육지처럼 걸으셨으며 당신이 손을 대자 문둥병자가 나았고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메시야 입니다. 당신이 권능을 베푸시면 저 무시무시한 로마는 무너질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며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듣지 않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능력만을 보면서 그 능력에 의지해서 예수를 따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분이신 것은 몰랐습니다.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죽으셨지만 사람들은 주께서 죽음을 말씀하셨다는 것조차 잊은 채 그 죽음을 슬퍼했고 그분을 장사지낸 후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잘못된 지식이 잘못된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4대 성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4대 성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말은 없습니다. 학문의 천재는 있을 수 있으나 도덕의 천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도덕은 인생의 경륜을 겪어야 나오는 법인데 예수의 나이는 서른 세 살이었습니다. 그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를 알았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을 알게 한 것은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세계 3대 성인들은 얼마나 겸손했는지 모릅니다. 석가모니에게 '당신은 니르바나(nirvana)를 아는가?'라고 하면 '니르바나가 있고 말고.', '그러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니르바나를 가르치는 손에 불과하다'고 하며 자신을 표지판에 비유하며 낮추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공자에게 '선생님, 내세를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오늘 일도 알지 못하는데 내세까지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소크라테스는 '내가 아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습니다. 3대 성인의 겸손한 말입니다. 예수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는 자신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그분이 우리의 구속주와 주님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를 사기꾼이나 과대망상증 환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믿습니까? 여러분의 상상의 예수입니까, 예수께서 자신을 설명하신 그 말씀의 예수입니까?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많이 듣고 그분의 행적을 그렇게 많이 보았으면서도 마음의 원함을 따라 예수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데도 예수인 줄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온전히 붙잡게 됩니다. 저들은 길을 가면서 계속 예수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혼자 묻어놓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슬픈 소식이든, 기쁜 소식이든 계속해서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목장에서 성경을 가지고 많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 때 놀랍게도 우리 마음속에 뜨거움이 전달되지 않습니까? 올해 은혜목장을 시작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어떻게 양육할까 고민하다 오십 오세 이상부터 칠십 세까지를 대상으로 은혜목장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늙었다고 몰아냐는 것이 아니냐 하며 화내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 시기는 아이도 다 키우고 인생의 쓴 맛 단 맛도 다 봤으며 가질 것도 다 가져 본, 인생을 멋지게 꽃피우고 열매맺어야 할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분들은 성경공부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나누는 대화 속에 주님께서 놀라운 은혜로 깨달음과 치료와 은혜를 주시기 시작하니까 이제는 모이길 참 잘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은혜를 서로 입으로 말하기 시작하십시오. 이웃에게도 나타내어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십시오. 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나누면 주께서는 그 대화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실제의 모습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간 두 사람이 이야기할 때 예수께서 그들이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띄고 머물러 서며, 그 중 글로바라 하는 자가 당신은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냐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무슨 일인지 물으시니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진실로 예수가 누구인지 가르치십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러한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구약은 어떤 내용의 책입니까?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인가를 말한 부분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모리야 산에 갔을 때에 자신의 아들 대신 죽어야 할 어린 양, 하나님의 구속주를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노래이심을, 솔로몬의 지혜인 것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고난받은 종,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그 예수를, 말라기를 통해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입니다. 4복음서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며 그분이 메시야임을 입증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사도행전은 전파되는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서신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요한계시록에서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볼 줄 안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를 확증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기초입니다. 이단들은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해 비틀고 나중에는 자신들의 능력만을 얘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입증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부활 신앙을 가르치면서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성경대로 예수님은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얘기가 있습니다. 해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베다니의 나사로입니다. 이 사람들과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셨고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 성경대로 그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대속하신 주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깨끗이 씻깁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영광을 얻습니다. 성경대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입증된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알기 원한다면 성경 속의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그들을 놀라게 하며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과, 그 약속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부활하셨음을 성경대로 가르쳤을 때, 저들의 마음은 뜨거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무르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얘기할 때 주님의 임재의 영광을 누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목장 모임에 꼭 나와야 합니다. 혼자서는 이상하게 안되지만, 목장모임에 나와 서로 말씀을 나눌 때에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교회에 오시면서 목장에 나오지 않는 분들은 교회 나오는 즐거움의 삼분의 일도 못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 무슨 말을 했는가를 확증하십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나를 향해서 어떤 약속을 하셨는가를 확증하십시오. 그 때, 임재하신 주님의 영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28절입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눅 24:28-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강권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열심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냥 그럭저럭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했습니다. 그는 천사를 붙들고 강권합니다.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수로보니게 여자는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냉담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7-28) 물러서지 않고, 강권했습니다. 바디메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 10:46-48) 다윗의 자손 예수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의 잠잠하라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전심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 바디메오에게는 다시는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붙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며 나갔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또 루디아라는 여인은 사도바울에게 이렇게 당신이 나를 예수 믿는 자로 알거든 우리 집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예수 믿은 이 여인이 강권해서 사도바울을 모시고 믿음의 사람과 함께 교제하는 모습을 봅니다.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에 관해서 말하는 것으로, 주께서 성경의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확실히 가르쳐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강권해서 집에 모시고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그 열심을 보시고 빛나는 모습을 보이시자 그들이 예수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앞에 강권함이나 불타는 열심이 없기 때문에 주께서 주신 은혜를 끝까지 받지 못하고 나중에 주께서 온전하게 주실 축복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권함과 갈망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남서울 은혜교회 성도들은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문화적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새 예배당을 지으니 사람들이 많이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속으로 '비겁한 사람들, 가려면 가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욕심을 하나 부리자면 불타는 열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강권함과 갈망, 이것만 있다면 주님의 임재의 충만한 영광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경제적인 사고방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 간신히 턱걸이해서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영원을 두고 후회할 것입니다. 세상에 그 후회보다 더 큰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사람,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강권하여 주님을 모시고 가자 주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온전한 축복 주시길 원하는데 갈망함이 없어서 온전한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 주님에 대한 일을 온전히 알고자 하는 갈망함이 없기 때문에 대충 여러분의 수준에만 맞도록 주시게 되는 경우, 자신의 그릇이 적기 때문에 주께서 넘치게 주시는 그 축복을 그냥 쏟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권하여 예수님을 모신 이 엠마오라 하는 촌은 영광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엠마오의 두 사람은 그 강권함 때문에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도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축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신 것처럼 근심과 걱정, 염려에 매여 있습니까? 한국 경제, 정직하게 말하면 언제 안심할 만큼 좋았던 적이 있습니까? 한국 정치가 나쁘다고 해도 군사문화 시절과 지금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에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대화가 달라져야 합니다. 만나서 매일 주식이나 부동산이 주제가 아닌 예수님을 주제로 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그분은 어떤 분이고,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에 집중하십시다. 이렇게 더 큰 열심으로 나아갈 때 그분께서 자신을 보여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립시다. 그래서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도 누렸다고 외치는 사람으로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야 떠들지 마라. 사람들의 떠들지 말라는 소리에 아랑곳없이 전심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외쳤습니다. 여러분, 그 강권함.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십자가 지신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발걸음입니다. 아마 다시는 그에게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붙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쳐대며 나갔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디아라는 여자 사도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예수 믿느 자로 알거든 우리 집에 가셔야 합니다. 강권해서 사도바울을 모시고 유럽에서 처음 예수 믿은 이 여인이 믿음의 사람과 함께 교제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들이 예수에 관해서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께서 성경에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확실히 가르쳐주는 것 그것만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강권해서 집에 모시고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그 열심을 보시고 그 빛나는 모습을 보이시자 그들이 예수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앞에 강권함이 없기 때문에 이 불타는 열심히 없기 때문에 주께서 주신 은혜를 시작만 받다가 끝나고 중간만 받다가 끝나고 나중에 주께서 온전하게 주실 축복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냔 말이에요. 주님의 은혜는 크고 놀라운데 지난 주 화요일 날 이병욱 장로님 간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얘기했어요. 한 번 이 테이프 못 들은 분 한번 들으십시오. 오늘 사 가지고 가셔서요. 고신대 의과대학 교수가 어떻게 주님과 함께 날마다를 사는가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강권함, 갈망, 우리 주님 기뻐하십니다. 우리 남서울 은혜교회 참 성도들 좋습니다. 사랑스럽습니다. 문화적입니다. 참 얼마나 좋습니까. 김동호 목사가 예배당을 지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떠나더래요. 그래서 그 사람이 속으로 비겁한 놈들 갈려면 가거라 그렇게 노래했다나.. 우리 옛날에 6.25때 들어본 노래예요. 근데 우리 성도들은 지으나 마나 똑같이 흔들림이 없이 그리고 무슨 소리도 크게 안b나게 또 지어지고 있어요. 그죠? 또 우리교회에 욕심을 하나 부리자면 불타는 열심이 필요해요.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 강권함, 갈망 이것만 가지면 주님의 임재의 충만한 영광을 누릴줄로 믿습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은 그냥 경제적으로 예수믿는 사람. 턱걸이로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 여러분, 영원을 두고 얼마나 후회할지 모를 거예요. 얼마나 후회힐지. 세상에 그 후회보다 더 큰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 강권하여 주님을 모시고 가자 그때야 자기의 전 모습을 보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온전한 축복을 주시려는데 여러분의 갈망이 없어서 주시다가 도중에 중단하는 경우가 있고, 여러분이 주님에 대한 지식을 온전히 알고자 갈망함이 없기 때문에 대충 여러분의 수준에 맞도록 주시는 경우도 있고 내 그릇이 적기 때문에 주께서 넘치게 주시는 그 축복을 그냥 쏟아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냔 말이에요. 강권하여 예수님을 모신 이 엠마오의 촌. 영광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냅다 쫓아가서 보니까 놀라운 사실은 거기에 예수 부활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엠마오의 두 사람은 그 강권함 때문에 듣는 것이 아니라 나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도 보았다.' 이런 축복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또 한번 해 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여러분, 왜 예수님 부활 안 하신 것처럼 근심 걱정 염려에 매여 있습니까? 한국 경제요? 여러분 정직하게 얘기합시다. 한국 경제가 언제 좋아 봤습니까? 언제 안심할 만큼 좋았던 적이 있습니까? 앞으로도 없습니다. 한국 정치? 오늘 나빠요? 언제 한국 정치가 나아진 적이 있습니까? 그래도 엄청나게 나아 졌습니다. 어떻게 나아 졌는가? 우리가 군사 문화 시절에 지금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에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대화가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달라지십시다. 만나서 매일 주식 얘기 하지 말고 땅값 얘기하지말고 예수님 얘기로 바꿔지십시다. 그리고 성경에서 그분은 어떤 분인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에 집중하십시다. 그리고 더 큰 열심히 나아갈 적에 그분께서 자신을 보여주시는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립시다. 그래서 듣는 사람이 아니라 나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도 누렸다고 외치는 사람으로 나도 이병욱 장로님처럼 주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외쳐대는 이런 성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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