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자유하십니까?
2001-12-28 21:10:16


본문 : 시23:1-6

오늘 본문 말씀은 금번 미국 테러사건을 통해서 더욱 유명해진 말씀입니다. 백악관을 향하던 비행기에서 승객들이 납치범을 공격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하던 모습이 블랙박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고백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로 인해 비행기는 다행히 중간에 폭파되고 말았습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도 시편 23편을 통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하여 국민을 위로했습니다.
시편23편은 게다가 마지막 죽음을 앞에 두고 최고로 많이 읽혀지는 성경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암송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속에 두어야 할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하나님 나라갈 때 외워 들려주어야 할 성경입니다.
왜 이렇게 시편 23편을 중요하게 생각할까요?
무슨 선전을 보니 밀레의 생가에서 바깥 풍경을 보는 선전이 있더라고요. 만종의 그림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들녘입니다. 밀레가 그 광경을 보고 그림을 그린 것이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시23편은 그런 그림을 보여 줍니다.
제가 제목을 붙이면 그림의 제목은 '자유'입니다.
영적인 자유! 세상의 자유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자유!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가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유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갈5장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물론 여기서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영적인 자유입니다. 즉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예배 드리려는 것도 자유하기 위함입니다. 문제는 많은 분들이 자유를 누리기 보다 오히려 죄책감을 가지고 삽니다. 이것이 가장 문제입니다.
저희 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예전에 장로 교회는 엄숙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검은 양복과 흰 와이셔츠를 입으라고 항상 훈련받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맞는 이야기도 됩니다. 오늘 아침에 흰 와이셔츠를 입을까, 파란 와이셔츠를 입을까 하다가 파란 와이셔츠를 입었습니다. 한동안 이것은 유동근 와이셔츠라해서 얼마마 유행이었습니까? 쓰리버튼 양복이 처음 나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부자유햇습니까? 그러나 지금 입어보니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이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비본질적인 것만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무엇인가 매여 있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멋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구원받고 사는 우리가 왜 이렇게 자유하지 못할까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 이야기 아시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나사로를 만났습니다. 무덤에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살아서 나오게 됩니다. 그때 나사로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그는 살아났지만 붕대로 온몸에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향해서 저 사람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그때 나사로는 완전히 자유를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얻었지만 여전히 죽음의 냄새를 풍기면서 붕대를 감고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옆 사람 보십시오, 혹시 붕대 메고 교회에 와 있는지 말입니다. 붕대를 풀 때야 비로소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붕대를 풀고 자유롭게 살아야 할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자유자가 되어야 하겠다 라고 마음먹으면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첫째로 욕망에서부터 자유로움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오늘의 삶의 거리에서 욕망의 포로가 되어 버린 사람들을 숱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실존적인 물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욕망을 해결하는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의 접근 방법을 취했습니다. 하나는 욕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부인하거나 제거함으로 욕망을 버려야 인간은 참으로 자유로와진다고 합니다. 동양의 많은 종교와 철학들이 이런 금욕주의적인 접근방법을 통하여 인간에게 욕망의 부인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욕망을 부인하려고 해도 내 의식의 밑바닥 속에서 이 욕망은 다시 솟아오릅니다. 이래서 인간의 피곤한 욕망의 행렬은 끝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접근 방법으로는 인간들은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서 욕망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떻게 욕망을 채울 수 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욕망을 해결하면 또 하나의 욕망이 찾아오고, 이래서 욕망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억울해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돈을 달라고 기도하면 돈을 더 잘 안주시는 것 같습니다. 공부 못한다고 기도하면 더 지혜를 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저를 골탕 먹이시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점차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돈을 너무 많이 벌면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너무 잘하면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내 주인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4영리라고 하는 책자를 보면 의자에 내가 앉아 있다가 주님이 앉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인생의 주인이 나에게서 주님을 바뀌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때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 나오는 고백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저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나는 세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과 동시에 우리는 다른 음성을 듣게 됩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웃기지 마라, 너 돈도 필요하잖아 돈, 그리고 넌 좋은 직장도 필요하고 그리고 네 자식도 문제가 많잖아. 네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이 많은지 알아? 웃기지 마라"
누가 하는 음성입니까? 이게? 사탄이 하는 음성이에요. 만약 우리가 이 음성을 듣고 마귀에게 동의를 하면 그 순간부터 좀더 갖기 위해서 욕망의 포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시편 23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말은 내가 양이라는 말이에요.
양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주 연약한 존재죠.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집을 찾아오지 못해요. 자기의 먹을 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양이 이런 문제를 고민하면 되겠습니까? 목자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고 하는 고백은 실로 가장 중요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23편이 중요한 구절이라 경상도, 전라도, 또 평양 방언으로, 사투리로 크리스천 인터넷 사이트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경상도 버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님이 내 목자라 카니 내사 마 답답할 끼 눈꼽만큼치도 없는 기라"
전라도 말로는요. "앗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 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것냐?"
피양 버전으로는 "아 여호와가 내 목잔데 뭐이가 부족 하간, 그저 시퍼런 풀밭에 쉬라딜 않나 목마르면 그저 물가로 데려가딜 않나 야, 뭐이가 부족 하간?"
여하튼 목자를 신뢰하는 모습이 본질적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만 하나님에게 맡기십시오, 그리고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 째로 두려움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이번 테러가 났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전쟁이 나는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 나라도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두려움이 걱정입니다. 두려움은 공격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이 두렵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잘 보면 저 괜찮습니다. 두려움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 경제공황 때 루즈벨트도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 순간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두려움 하나뿐입니다. 두려움을 제외하고 두려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리 걱정하고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공지영이 쓴 수도원 기행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쓴 글입니다. 그런데 남편과 출국수속을 밟는데 1억원, 1억5천만원 짜리 보험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갈등을 했답니다. 그런데 돈 많이 타려고 좋은 것을 들려다 보니 이것은 내가 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되면서 허망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려움 때문에 들게 되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일은 두려움이 함께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날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를 갈 때가 있습니다. 두려운 곳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다가 질병을 만날 때, 살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할 때, 살다가 우리가 갑작스러운 재앙을 만날 때 우리는 사망의 노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두려움의 노예로, 공포의 노예로 변신하기 시작합니다.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모레에 대한, 장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서 꼼짝없이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인생의 계곡에 사망의 음침한 그늘이 우리를 덮고 있습니다. 질병의 우리를 찾아옵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똑같이 질병이, 사고가, 재앙이, 삶의 대한 불안이 우리의 가슴을 엄습해 오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두려움을 이겨내면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순교를 하게 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을 들고 오지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 한가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어느 정도로 함께 하시는 줄 아십니까? 4절 후반 절을 보세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시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팡이는 본래 팔레스틴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노인들이 사용하는 것처럼 끝이 구부러져 있습니다. 목자들은 그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다니면서 방향 제시용으로 사용하였고, 양이 길을 가다가 옆으로 탈선할 가능성이 있으면 양의 목이나 다리에 이것을 걸어서 제길로 올려 세웁니다. 또는 때때로 말을 듣지 않을 때는 톡톡 쳐서 제길로 갈 수 있도록 경고를 주기도 합니다. 막대기는 야생동물이 짐승들이 공격할 때 적들을 쫓아버리는 그런 보호용으로 쓰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항상 이 막대기를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주님의 도우심, 이 주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이 캄캄한 어둠의 골짜기를 빠져 나옵니다.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알지 못하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까?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10원 짜리 동전에 불상이 들어 있는 것 아시죠? 어떤 집에 아이가 아프데요. 기도해도 안 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 주머니에 10원 짜리 동전이 잔뜩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전을 없앴더니 낳았대요. 그랬더니 "아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능력 없으신 분이십니까?
저에게 그 동전을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그것 뿐 아닙니다. 예전에는 예수 믿는 집에 가서 명태 뜯는 것이 일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무서워서 명태하나 뜯어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슨 그리스도 군사입니까?
혹간에 마귀에게 쩔쩔매는 분이 계십니다. 자포자기하는 분이 계십니다. 두려워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내려놓아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셋째, 시편은 참된 자유라는 것은 죽음에서의 자유라고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골짜기를 가보니 저희와는 다릅니다.
옆에 아무 것도 없고 깊은 골짜기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강도 만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험한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를 예를 들은 것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사망의 골짜기를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문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성수대교 사고이후 다리 지나가기가 떨립니다.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에는 지하 주차장 들어가면 가능한 낮은 층수에 주차하려고 애를 씁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물론이고 기차,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사방에 사망이 우리를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망권세는 마귀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도 죽습니다. 죽음의 확률은 100% 입니다. 1:1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어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유는 죽음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가 "아! 죽는구나!" 생각한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리고 걱정이 됩니까?
미국의 어린 소년 하나가 암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아들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거의 결정적으로 선고받았던 그 날부터 엄마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성경을 일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시편을 읽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시편 23편을 즐겨 읽었습니다. 그리고 시편 23편의 내용을 어린 아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에 목자가 되어 인도하시면 이 세상도 좋지만, 우리의 삶이 다하는 날 주께서 인도하시는 영원한 집을 향해 가는 일은 더 좋은 일이라고 아들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구절을 영어로 읽으면 꼭 다섯 글자입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엄마는 사랑하는 아들의 손을 잡아 주고, 손가락 하나 하나 꼽으면서 이 말씀을 가슴에 심었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특별히 네 번째 반지 끼는 손가락을 꼽을 때는 아들의 손에 힘을 쥐어주면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시고 너의 목자가 되신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없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너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거야. 우리가 그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너의 목자로 신뢰하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두 시간 후, 이 어린 소년은 눈을 감았습니다. 차디차게 식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본 순간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들은 죽어가면서 자기의 오른손으로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을 꼭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러린 소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영원한 집을 향해서 출발한 것입니다.
이 어린 소년의 소망은 곧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낳은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찬송 작곡가인 존 피터스는 다음의 가사에 이 아름다운 복음성가의 곡을 붙였습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때에
시험과 환난 많으나 예수 인도 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를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망 권세를 물리 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죽음의 자유에 대해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후 5장 1절을 통해 "만일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집이 있는 줄 안다" 바울은 그래서 죽음 앞에서 나는 낙심치 않는다, 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였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마치 이사를 가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사갈 때 아쉬움은 있지만 엉엉하면서 괴롭다고 발버둥치지는 않죠? 그냥 이사가는 것으로 끝을 내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사갈 집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로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묻습니다. 얼마나 자유하십니까? 참으로 죽음으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욕심으로부터, 아니 이 모든 것을 가져오는 근원적인 죄로부터 자유하십니까? 바로 이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 분은 여러분과 나의 쇠사슬을 대신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인 순간,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그 아버지를 신뢰하는 그 순간 이 자유의 고백은 바로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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