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3)
2001-12-28 16:55:31

마태 1:18-25
일시: 12/23/01(대림절 제 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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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 우리는 성탄을 맞게 됩니다. 이맘때면 대개 성탄 캐럴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거리마다 쏟아져 나오고, 시끌벅적 하곤 했습니다만, 요즘에는 그런 들뜬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 쓸쓸해서 올해 우리 교회에서는 성탄 분위기를 위해 교회 정원 나뭇가지에 안개 등을 켜서 밝혀놓았습니다. 어찌되었건, 썰렁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성탄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지내는 성탄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탄생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번 성탄을 맞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다른 성인(聖人)들, 곧 부처, 소크라테스, 공자 같은 분들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살피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본문(本文)을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이 될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어머니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에서 그와의 성적 접촉이 없이 아기를 가지게 되었던 겁니다. 당시 유대 관습으로는 약혼한 상태에서 성적 접촉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대에는 물론이고, 저의 부모님 세대만 해도 부모가 짝 지워 주는 대로 결혼을 했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저의 큰아버지를 낳고 나서 당신 남편이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봤다고 하셨습니다. 도무지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만큼 옛날 관습이 엄격했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파혼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천사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童貞女)에게서 잉태되어 나신 분이십니다. 또,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왔지만 아들(예수)을 낳기까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순결한 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분은 가장 맑은 눈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고 진하 목사가 쓴 장편동화『꼬마 예수』에 주인공 아이가 묘사한 예수의 모습입니다. "나는 예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날깃 날깃 닳은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한없이 맑고 깊어 보였다. 그 눈동자 속에는 신비한 광채로 빛나는 보석이라도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또, 레이몬드 파니카라는 종교 철학자가 쓴『지혜의 보금자리』에 보면, "정결함을 통해서 아름다움이 간직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맑고 아름답고, 순결한 분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3장 5절 뒷 부분에 보면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라 해도 그를 죄가 하나도 없다고 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죄 없이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또, 그분은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모두 속에는 욕심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욕심이 없으시고, 마음이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아름답고 순결한 분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전혀 욕심이 없이, 자신을 남을 위해 다 내어 준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이어리(Guirey)라는 분이 1922년에 작사한 <샤론의 꽃 예수>(89장)야 말로 예수님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 찬송이라고 생각합니다.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간데 마다 풍겨나게 하소서(1절)
예수(나의 주여) 샤론의 꽃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후렴).

이 찬송 시는 예수를 아름다운 <샤론의 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가서 2장 1절의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라는 말씀에 기초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 만큼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물론 꽃은 대개 아름다운 여성(女性)을 빗대어서 표현하는 말이지만,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이런 꽃에 비유했겠습니까! 여기서 샤론의 꽃은 사랑의 꽃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피어나는 사랑의 꽃말입니다. 예수님을 꽃에 비유한 것은 겸손하고 강한 사랑이 넘치는 분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의 꽃이야말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며, 영원히 시들지 않고 향기를 뿜어내는 꽃입니다. 이런 사랑의 향기가 우리 삶에서 우러나오게 될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종교의 창시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오신 분이시라는 게 다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죄' 이야기를 하면 아주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현대인들은 죄책감(罪責感)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양심이 무디어진 자들이 많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죄는 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중풍병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태 9:2). 또 마태복음 9:13에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 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을 했습니다. 이런 탄식을 한 후에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예수 그리스도]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고후 1:10).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라고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구주 예수를 의지하는 것이 기쁜 일입니다. 왜냐 구요? 그것은 구주 예수를 의지하게 될 때, 죄악을 벗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며, 고통에서 안위 받고 영생함을 모두 얻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큰 은혜를 받은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속죄(贖罪)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어느 날 제 가슴에 콱∼ 화살처럼 박혀왔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에서 저를 괴롭히던 무거운 죄 짐이 다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요한일서 1:9의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自白)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여러분이 죄 용서함 받기를 원하면 먼저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회개 없이는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심을 믿으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 백성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다시 한번 우리가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셔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라고 하는 말은 '건져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도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어 살리는 것, 또는 극심한 화재가 나서 불이 막 타는 중에 거기 갇혀 있던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려고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모셔들이는 자 마다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23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세상에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저는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의 표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성경에서 두 가지 이미지를 건져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이집트)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도중 광야를 행진해 갈 때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비추어 주셨다고 합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출 13:21-22)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때 그 백성들의 감동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때 그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두 번째 임마누엘의 표징을 저는 <친구>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여서 우리가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본체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또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지셨으며,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찬송가 82장∼103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찬송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많은 곳에서 예수를 '친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요단 강을 건너가서 시온 성을 향할 때 나와 항상 동행할 이 누굴까... 주 예수 주 예수 주 예수 밖에 누가 있으랴 슬퍼 낙심될 때에 내 <친구> 되시는 구주 예수 밖에 다시 없도다"(83장).
- "내가 의지하는 예수 나의 사모하는 <친구> 나의 기도 들으사 응답하여 주시니 미쁘신 나의 좋은 <친구>"(86장)
-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친구> 되시니 그 은혜를 간구 하면 풍성히 받으리"(93장)
- "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 없는 나의 <친구>"(97장)
- "내 진실하신 <친구>여 큰 은혜 내려주사 날 항상 보호하시고 내 방패 되옵소서"(98장)라고 했습니다.

친구란 무엇입니까? 항상 나와 함께 하는 게 친구입니다. 언제나 나를 버리지 않고 곁에 있어 주는 게 친구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외로운 자, 약한 자, 버림받은 자, 잊혀진 자의 친구로 이 땅에 오셨으며, 지금도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없으면 사귀었다가도 버립니다.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임마누엘 하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십니다. 우리와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십니다. 마더 데레사의 『말씀』(Mother Teresa: In My Own Words)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한 번은 영국에 있는 양로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참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40명의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양로원 노인들의 시선이 모두 문 쪽에 가 있었습니다. 웃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집은 가톨릭의 한 수도원에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레사 수녀가 거기에서 일을 맡고 있는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웃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군요. 왜 그렇지요? 그리고 왜 계속해서 문 쪽만 바라보고 있는 거지요?" 그 수녀는, "늘 그런걸요. 혹시 누군가 와 주지 않을까 기다리는 거지요. 딸이나 아들, 가족 혹은 친구가 그 문을 통해 들어오기를 꿈꾸고 있는 겁니다"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데레사 수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버림받은 자신을 바라보는 가난, 그 가난에 대한표현이 고독입니다. 자기를 보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노인들을 가장 고독하게 만듭니다.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소외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서 얼마나 슬프실 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항상 함께 해 주시듯이 우리도 고독한 자, 병든 자, 고통 당하는 자, 약한 자, 소외 된 자의 친구가 되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 된 이유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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