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중풍병 환자와 네 사람
2001-12-28 16:31:37

마가 2:1-12
일시: 8/12/2001(주일 낮/광복기념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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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우리는 광복 56주년을 맞게 됩니다. 광복 기념주일을 맞아 다시 한번 이 나라, 이 민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 나라를 보면 안타까운 심정이 듭니다. 뭐 하나 제대로 되어 가는 게 없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어느 방면에도 진정한 발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탄 섞인 소리만 들립니다. 그 누구라도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 앞으로 잘 될 거다"라고 명확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들 "안 된다, 희망이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한 중풍병 환자가 고침 받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대하면서 "아, 예수님께서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구나!"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 이야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숨겨 있는지 이제 함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1. 이 중풍병(中風病) 환자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중풍병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중풍병 환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계명대 의대 신경과의 임 정근 교수는 뇌졸중(중풍)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뇌졸중은 예로부터 바람이라고 불려지는 질환으로 뇌혈관이 막히거나 파열되어 발생한다. 뇌졸중의 발생빈도는 과거 10여 년 동안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사망 원인별로는 암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한다. 뇌졸중은 허혈성 뇌졸중과 출혈성 뇌졸중으로 나눌 수 있다. 허혈성 뇌졸중은 뇌의 일부에 혈류가 차단되거나 부족하게 되어 뇌 조직으로 산소와 영양공급이 충분치 못할 때 발생된다. 출혈성 뇌졸중은 뇌의 혈관이 파열되어 뇌 속에서 출혈되어 생긴다." 뇌의 손상을 입게 됨으로써 몸의 어떤 부위의 감각이 둔해지고, 저린다든지, 몸의 일부가 마비 되고, 목이 뻣뻣해 지고, 어지럼증, 구토, 의식의 혼미 등의 증상이 생긴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중풍은 피의 흐름이 막혀 생기는 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뇌에 산소와 영양공급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각이 마비되고, 의식이 혼미(昏迷)해지고, 거동이 불편해 지며, 결국 꼼짝 못하고 누워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풍병 환자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침상에 누워있는 그대로 사람들이 그를 데려왔던 것입니다. 이 중풍병 환자를 나와 상관없는 그 어떤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모습, 우리 가정의 상태, 우리 나라의 형편이 바로 중풍병 걸린 것과 같은 것은 아닌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걸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절망스런 상황에 있던 여기 본문의 중풍병 환자는 남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언가 꽉 막혀 있는 것 같다. 사는 게 답답하다. 모든 게 다 혼돈 스럽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다 시들해 졌다. 무감각해 졌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무 의욕도 없다. 무기력해 졌다"고 느끼진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병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보면 중풍병 환자의 모습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9월부터 우리 교회에서 강원도 최초로 아버지 학교를 하려고 합니다. 가장(家長)인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요즘 가정마다 많은 문제가 있다는 걸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아버지 학교는, 가정이 치유되려면 아버지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건전한 평신도 복음운동입니다. 많은 아버지들이 적극 참여하여 어그러진 가정들이 건강하게, 새로 태어나는 복된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 주께 나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중풍병 환자를 예수께 데려와 고침 받게 한 네 사람이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네 사람의 태도가 훌륭합니다. 본문 5절 앞부분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예수님이 감동하실 정도였을까요? 아주 적극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예수님이 감동 받으신 겁니다. 우리도 주님이 감동하실만한 믿음을 가진다면, 주님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언젠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 주 하나님, 보십시오.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니, 주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렘 32:17). 이 기도에는 예레미야의 확고한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를 어찌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내년 이맘때쯤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때가 지났다고 생각한 사라가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하고 웃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그 때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 맘 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자 두려워서 사라는 거짓말로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자, 주께서 "아니, 너는 웃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사라가 장차 열국(列國)의 어미가 되기 위해서는 '상식(常識)'에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함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줄로 생각됩니다.

본문의 중풍병 환자의 친구(이웃)로 생각되는 네 사람은 앞의 마가복음 1장에서 나병 환자가 예수께 나와 깨끗함을 받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 당시 나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었고, 또 나병을 고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만큼 어려웠는데, 이런 나병을 고치신 예수께서 자기 친구의 병(중풍)을 고쳐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예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런 그들의 믿음이 이 중풍병 환자를 살린 것입니다.

천사가 처녀의 몸이었던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을 알려주며 "하나님께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 없다"(눅 1:37)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더라도―이런 믿음만 있다면―그 어느 것도 두려울 게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중풍병 환자를 예수께 데리고 온 이 네 사람과 같은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 믿음으로 주께 나오면, 몸과 마음과 영혼의 병이 고침 받습니다.
- 믿음으로 주께 나오면, 죄 사함 받습니다.
- 믿음으로 주께 나오면, 새 힘을 얻습니다.
- 믿음으로 주께 나오면, 삶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이런 금과 같이 귀한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주께 나오십시오.

행동하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 장애를 제거합시다.
본문 4절에 보면,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걸 보면 중풍병 환자를 예수께 데려온 그 네 사람은 대단한 사람들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붕을 뜯었다고 했는데, 아마 "어떻게 지붕을 뜯을 수 있었을까" 하며 다들 의아하게 생각되실 겁니다. 그런데 여기 지붕은 오늘날 콘크리트로 된 슬라브 지붕이 아니었다. 나무 가지를 엮어서 점토(粘土)를 발라 만든 것인데 밖에서 지붕으로 오르는 층계가 있었기에, 뜯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 같으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문 앞에 들어설 자리가 없는 걸 알면, 데리고 왔다가도 포기하고 그냥 가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네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나뭇가지와 흙을 이겨 만든 지붕이라도 그걸 뜯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자기 집 지붕을 뜯는 걸 주인이 보았으면 "이거 보시오. 왜 남의 집을 뜯고 난리요" 하며 제지했을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아마 "돈이 들면 저희가 물어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의 사정이 너무 심해서요"하고 양해를 구했을 겁니다. 그들을 정말 대단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적극적이 믿음의 자세가 있었기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 환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로 그치는 믿음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이 따르는 믿음을 가질 때 불가능이 가능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데는 반드시 장애가 있기 마련이며, 우리가 주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를 모두 제거할 때 비로소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중풍병 환자에게는 지붕이라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이 지붕을 뜯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이 없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치 아니하리로다"(시 101:5).

다음에, 욕심입니다.
갈라디아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라"고 하면서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른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이 바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막는 것을 뜻합니다. 이게 바로 육체의 욕망이라는 겁니다. 마음속에 세상의 명예욕이나 물욕, 그 밖의 여러 가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이런 자를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만나려면 이런 헛된 욕망을 다 내리십시오. 그 때 여러분 앞에 새로운 삶의 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 다음에, 번잡한 상념(想念)과 분주함입니다.
세상에 속한 이러저러한 복잡한 생각이 있는 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런 사람에겐 은혜가 내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겐 말씀이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너무 바빠도 문제입니다. 바쁘다고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지 말고, 잠시라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앉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께 여쭙는 생활에 힘쓸 때 주님이 여러분에게 오시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본문의 네 사람이 지붕을 뜯어내듯이―나오면,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빈 마음으로 나와 주께 엎드리면 주께서 긍훌과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엎드려 간구하는 자를 주님은 물리친 법이 없으십니다. 주님께 나오는 것이 살길입니다. 고침 받는 길이요, 형통함을 얻는 길입니다.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중풍병 환자는 혼자의 힘으로 주께 나올 수 없었습니다. 친구로 생각되는 네 사람이 그를 데려 나왔습니다. 이 네 사람이 없었으면 이 중풍병 환자는 고침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네 사람과 같은 일을 해 줄 손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 장군에게도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한 히브리 소녀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찾아가시면 나병을 고침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일러주었기에 나아만이 고침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북한 강원도에 자전거 보내는 운동에 우리 교회가 적극 참여하여 50대를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에 참여하신 교우 여러분에게 고마운 말씀을 드립니다. 북 강원도 어느 마을 사람들이 우리가 보낸 자전거를 앞으로 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가 보낸 자전거를 타면서 주님의 사랑, 동포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 그들이 주님께 나와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오늘 광복 기념주일을 맞아 이런 사랑에서 우러나온 손길을 통해 북한 동포들과 우리가 더 가까워지고, 앞으로 평화 통일을 이루게 될 날을 기다려 봅니다. 이것은 단지 환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비전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평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믿음에서 우러난 비전(희망)을 행동으로 옮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이 되어 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이런 주님의 부름에 응답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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