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엘리트 나아만이 죽다
2001-12-28 13:58:06

왕하 5:1-14 경배 찬송: 50장/ 설교 전 찬송: 217장/ 교독문: 25번(시편 103편) 설교 후 찬송: 221장

일시: 7/8/2001(주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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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대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아만을 교만한 사람,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오늘 다른 각도에서 나아만을 조명(照明)해 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람(시리아) 왕의 신임을 받는 군대 장관(또는 군사령관)이었고, 큰 인물이요, 존경받는 사람이었으며, 강한 용사였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소위 성공한 사람,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 권세 있는 사람,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당대(當代)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것입니다. 나아만에게는 훌륭한 점이 많았습니다. 어떤 점이 훌륭한가 찾아봅시다.

첫째, 나아만은 열심히 노력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아만은 그런 높은 지위에 저절로 오른 게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엔 엄청난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배나 노력을 했을 겁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들보다 더 많은 고생과 수고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V 프로그램 중에 <성공 시대>라는 것을 보면, 성공한 사람들이 그냥 성공한 게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생을 수없이 하고, 실패도 여러 번 하면서도 끈질기게 한가지를 붙잡고 늘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이 왕의 인정을 받고, 군사령관이 된 것도 그의 숱한 노력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냥 인정을 받은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나아만은 무척 자애(慈愛)로운 사람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엘리사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했을 때, 분을 내며 그냥 가자고 하는 그에게 그 종들이(부하들이) "내 아버지여"(13절)라고 한 것을 보면, 비록 그들이 종이었지만, 평소 그들을 아버지처럼 자애롭게 대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종들이 주인 나아만에게 아무런 애착도 없었다면 가자고 할 때 같이 가면 그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네들을 아껴 주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는 주인 나아만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처럼 느꼈기에, 그렇게도 간곡하게 요단 강물에 몸을 담그라고 권하였고, 그 결과 나아만이 고침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나아만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한 소녀가 이스라엘에 나병을 고칠 수 있는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또 요단강에 몸을 담그라는 종들의 간청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나아만은 그렇게 완고한 사람이 아니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수용적인 태도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나병을 고침 받은 후 나아만은 그냥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단강에서부터 사마리아 고지(高地)에 있던 엘리사의 집까지 약 30km(80여리) 이상 되었지만, 거기까지 일부러 찾아가서 엘리사에게 사례(謝禮)하려고 했습니다. 이걸 보면 나아만은 예의범절(禮儀凡節)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볼 때, 나아만이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올랐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성품을 지닌,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물질과 명예와 권세, 그리고 인격과 덕망까지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살던 그의 몸에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에 반점이 생기고 온 몸에 버짐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악성 피부 질환에 걸린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나아만이 나병에 걸린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이 병은 히브리어로 '차라앗'이나 '메초라'라고 하는데, 각종 악성 피부 질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른버짐이라고 하는 성서학자들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마른버짐도 심해지면 사람들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나아만의 병이 그리 심각한 지경에까지는 다다른 상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 초기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왕에게 가서 보고는 한 것을 보면 전염성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과 늘 만나야 하는 위치에 있던 나아만에게는 이런 악성 피부 질환을 앓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그는 많은 왕족과 귀족들과 파티를 즐기고 만찬을 하며 날마다 즐겁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을 터인데, 이런 몸쓸 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아마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싶어 낙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좋은 소식'(Good News)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쳐들어가서 잡아온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나아만의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3절)고 한 것입니다. 나아만은 이 소녀의 말을 믿고 왕에게 갔습니다. 왕은 신임하는 부하 나아만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親書)를 얼른 써 주었습니다. 나아만은 왕의 친서를 가지고 이스라엘로 가게 되었습니다. 은 열 달란트와 금 육 천개와 옷 열 벌도 함께 가지고 갔습니다. 나아만은 왕의 친서를 전했습니다.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나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병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6절)는 내용의 친서를 읽자 이스라엘 왕은 크게 낙담(落膽)하여 옷을 찢으며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7절)

여기서 시리아 왕은 나아만으로부터 이스라엘에 나병을 고칠 수 있는 예언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마 그 사람이 궁중에 예속된 마술사(魔術師) 정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왕이 명령을 하면 그 예언자가 말을 들을 것이고, 그러면 자기 신하 나아만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런 편지를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당시 이스라엘 보다 더 힘이 강했던 시리아 왕의 편지를 받고 두려움에 떨며 옷을 찢고 야단을 한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왕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왜 옷을 찢었느냐"고 하면서 자기에게 그 사람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에 가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나아만 일행은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도착하여 멈추어 섰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을 직접 만나 주지도 않고, 그냥 사환을 시켜서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다"라고만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이 화를 내면서 불평을 했지만, 결국 종들의 강권으로 엘리사의 말대로 해서 나병을 고침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신앙적인 교훈 몇 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① 모든 병(病)이나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이 살며 한 몸에 존경을 받던 나아만에게 나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먼저 낙담했을 겁니다. 병이 발병했을 때에는 이 병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으나, 후에 그는 병이 자기에게 왜 왔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의 병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라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그가 만약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병은 나아만으로 하여금 이제까지 눈에 보이는 것들(소유, 명성, 권세 등)을 추구하던 그의 삶의 자리에서 좀더 내면적(內面的)이고 영적(靈的)인 삶의 차원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기 위한 고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뜻하신 바로 그 자신'이 될 수 있게 만들어 준 아픔이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자기 실현을 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예기치 않은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는 삶의 차원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너무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추구하고, 온통 물질주의적인 것을 최고로 여기는 삶에서 나오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나큰 은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잠그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라고 했을 때 거부했습니다. 자기네 나라의 다메섹에 있는 강들과 요단 강을 비교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엘리사가 그를 나와서 맞아 주지 않은 것도 그가 화가 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엘리사가 당연히 밖에 나와 그를 정중히 기다리다가 그를 환대하고 나병의 상처에 직접 안수를 해 줄줄 알았는데, 겨우 사환을 시켜 메시지만 전한 것입니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잔뜩 화가 났습니다. 요단 강물은 나아만이 알기에는 다메섹의 맑은 강물에 비하면 형편없는 흙탕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미리 판단을 하고 있었던 그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왜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안수해 주지 않고 요단 강물에 가서 몸을 잠그라고 했을까요? 여기에는 그가 내면적인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무의식에 침잠하는 것입니다. 즉, 혼란 상태에 빠진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 에너지를 외부적 삶으로부터 회수(回收)하여 무의식에 몰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내향화(內向化, introversion) 작업을 하라는 요청입니다. 이제 까지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최고의 가치였다면, 이제부터는 내면적(內面的)인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 왔어도 아직 세속적인 가치관에 매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를 놓고 다툰 적이 있습니다. 현실을 살면서 외부적인 세계(external world),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대의 현대인들은 너무 가시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 같이 생각이 됩니다.

며칠 전에 강남(江南)에 있는 심리치료 연구소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저녁 약속을 한 어떤 신부님과 압구정동 현대 백화점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들어갔었는데,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부님에게 "아! 정신이 하나도 없군요"라고 했더니, 자기도 이 곳에 처음 와 본다고 했습니다. 화려하고 비싼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는 그곳이 저에겐 현대 물질문명(物質文明)의 창고(倉庫) 같이 느껴졌습니다.

엘리사는, 나병에 걸려 찾아온 나아만, 이제까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 온 나아만에게 "요단 강물에 몸을 일 곱 번 잠그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제 당신은 내면적(內面的)·영적(靈的)인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②어린아이 같이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봅시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의 살결이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다는 말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린아이같이 '단순(單純)하고 純粹(순수)한 마음'으로 요단 강물에 몸을 잠그게 될 때, 그의 병이 나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아지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아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방 신에게 적당히 예물을 바치고 제사하면, 그저 편안하게 살 줄 알았던 그가 이제는 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17절)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어른의 종인 저는, 이제부터 주님 이외에 다른 신들에게는 번제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17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가치관도 세계계관도 다 변한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 인줄 알았던 그에게 전혀 새로운 영적 세계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순수한 마음, 어린아이같이 단순한 마음으로 살면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날마다 거듭나서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차게 사는 자랑스런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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