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로 다닐지라도 2001-12-25 17:25:0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 4-6절) <목회기도> 하나님! 오늘을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전 세계가 놀란 테러를 통해 우리의 가슴은 지금도 두근거리며 진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모두 잘못된 생각을 진리라고 따르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는 우리 신앙의 근거인 땅, 이스라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된 시오니즘(Zionism)을 주장하지 않고 아랍권과도 사랑을 나누며 사는 백성들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나라들이 이 세상에서의 땅 뺏기 싸움을 그치고 영원한 세계,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 미국이라는 큰 나라가 분노에만 사로잡히지 말게 하시고 원수 갚음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아 피의 보복이 확대되지 않도록 하시고 같이 사는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일로 인해 경제가 더 어려워지고 사업하는 성도들의 피해가 많아 염려됩니다. 기둥교회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를 지켜 주시옵소서. 이 때에 군에 간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저들이 사람을 향해 총쏘는 일이 없게 지켜 주시옵소서. 외국에 있는 성도들 평안토록 지켜 주시옵소서. 병으로 교회 오지 못한 성도들, 아픈 몸을 이끌고 교회에 나온 성도들… 하나님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영육간에 깨끗함 받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실 줄로 믿사옵고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미국의 뉴욕(New York)과 워싱턴(Washington, D.C.)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실종되었습니다. '실종'(失踪)이라는 말은 '소재를 알 수 없다'라는 것인데 엄밀히 말해서 실종은 아닙니다. 우리는 대부분 지금 찾지 못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 지 그 소재를 알고 있습니다. 건물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데 대부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고 기막힌 세상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열매를 냅니다. 엄청난 건축물, 비행기, 우주선, 항공모함, 잠수함 그밖의 우리의 예측을 불허하는 첨단 무기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보다는 그것들을 나쁘게 쓰는 인간이 더 무섭습니다. 저는 요즘 [사람이 악해지면 어디까지 악해질까?]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비록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믿는 종교적 신념과 종교적 이상을 실현한다는 이유로 상식과 도덕을 초월하고 타인의 재산과 생명을 해친다면 그것은 이미 정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라고 할 수도 없고 '악(惡)', 사악한 악일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거나 평안하지 만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많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오라는 유혹과 가라는 유혹이 많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 넣으려는 악한 세력들도 이 땅에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23편은 구약 성경 중에 가장 많이 읽혀지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노래합니다. 저는 오늘 4절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4절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인도를 따라 다닌다 해도 새로운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려면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중에 어떤 이는 사업에 실패하고 한숨 짓고, 시험에 낙방하고 기막힌 세월을 보내고, 연애/결혼에 실패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는 사고로 다쳐서 고생하며, 어떤 이는 사건에 휩싸여 기막힌 일을 겪습니다.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주일 성수하며 십일조 드리며 어떻게 하든 바르게 살려고 애쓰고 하나님 뜻에 따르려 해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 비관/낙심/절망/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수나 실패,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날 때 비관하거나, 낙망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수와 실패, 고난과 역경을 겪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실수와 실패, 고난과 역경을 겪는 것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악한 일을 함으로 받는 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을 멀리하고 선하게, 믿음 안에서 살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겪는 아픔과 눈물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았고 다쳤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 뿐… 남은 사람들은 좌절하고 실망하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의 자세로 힘있게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그 사건으로 인해 피의 보복을 하겠다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지난 목요일에 강의를 하기 위해 운전을 하고 가다가 미국의 죠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통역을 하는데 어느 부분에 가서는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통역하는 사람이 크리스챤이 아니더라도, 공정성을 가진 언론이라 할지라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하는 연설문을 통역하다 왜 그 부분에 가서는 통역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분노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통역을 하다가 통역을 하지 않은 부분을 잠간 들려 드리겠습니다. 오늘밤 나는 슬픔에 잠긴 모든 이들, 자신의 세상이 파괴된 모든 이들, 안정감과 안전을 위협받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나는 이들이 시편 23편 4절 말씀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씀으로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부시(Bush)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시편을 인용해 담화문을 발표하고 기도를 요청하는 것에 저는 감동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요청한 후에 부시 대통령은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복할 것도 밝혔습니다. 이점은 기도요청을 했던 부시대통령이 칭찬 받을 일이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의 이번 사고와 사건으로 인해 보복의 악순환과 큰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 응징하겠다는 말에 '그래야지. 정신차리게 해 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벌써 미국에서 우리나라에게 군사적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전쟁이 커지게 되면 지난 월남전에 참전했던 젊은이들처럼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또 희생될 지도 모릅니다. 미국은 평상시에는 지원자들만 군대에 갑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강제로 젊은이들을 징집을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뜻하지 않게 불려 들어가 전쟁을 치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여러분들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자녀들이 군대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실수와 실패,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실수와 실패, 고난과 역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실수가 너무 많으면 문제지만 가끔 실수하고 '죄송하다'고 하는 사람은 구수하고 정이 갑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실수 했습니다"라고 자신의 실수를 바른 태도로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은 멋있는 사람입니다. 리더십 전문가인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이렇게 말합니다. "더 훌륭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실수를 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일을 더 많이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을 제일 높은 자리로 승진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평범한 사람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실수는 성공으로 이르는 길을 닦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실수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데 그런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발전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들 대부분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고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사회제도, 정부의 정책… 등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은 "운이 나빳다"는 말로 스스로의 위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더 속된 표현으로 "나는 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실수와 실패를 감추려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에덴 동산의 처음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죄를 짓고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나무 숲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성경에는 감춘 것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야한 표현도 직설적으로 나타나 있고, 너무 심한 표현도 있습니다. 유명한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약점과 부끄러운 삶, 실패와 고난 당한 것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성경은 그러기에 더 매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실수했음에도 하나님께 용서 받고 쓰임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패가 주는 재미도 있습니다. 드라마의 NG모음이 얼마나 재미 있습니까? 스포츠에서 선수들이 자살골을 넣어 팀에 손해는 주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로서는 재미있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안전한 것보다는 실수와 실패가 있는 모험이 더 멋집니다. 미국의 야구선수인 맥스 캐리(Max Carey)는 실수를 좀처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느 시즌에서 맥스 캐리는 도루를 53번 시도해서 2번 실수하고 51번 성공했습니다. 도루 성공률이 96%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유명하지 않습니다. 타이 코부(Ty Cobb)라는 선수는 같은 시즌에 도루 성공률 71%로 134번 시도해서 96번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중 96%의 성공률을 가진 맥스 캐리보다 71%의 성공률을 가진 타이 코부가 더 유명하고 사람들이 더 좋아합니다. 실패가 많았어도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성공을 많이 한 사람으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실패를 감추려 하거나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탠리 저드(H. Stanley Judd)라는 사람은 "실패를 감추려는 노력으로 힘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실패를 통해 배우고 다음 단계의 도전을 향해 나아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실수와, 실패, 고난과 역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실수와 실패,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실수와 실패,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날 때 좌절하여 실망하지 말고 다시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evil, 사악)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staff)와 막대기(rod)가 나를 안위(comfort)하시나이다"(시23:4)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목자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목자가 어디로 인도하든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지라도 사악함과 악을 두려움의 대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함께 계신 주님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will)를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실수와 실패를 했어도 고난과 역경을 겪고 있더라도 기도하며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에 직면하게 되면, 실패한 사람들 대부분은 틀에 박힌 일만 하려는 경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실패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안돼. 그냥 살아야지"하며 체념합니다. 경영학 교수인 개리 해멀(Gary Hamel)과 프라할라드(C. K. Prahalad)는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중앙에 긴 막대기가 세워져 있는 한 방에 원숭이 네 마리를 넣어 두었습니다. 그 막대기의 꼭대기에는 바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배가 고픈 한 원숭이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막대기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나를 잡아채려는 순간 억수같이 퍼붓는 찬물을 뒤집어 쓰고 말았습니다. 그 원숭이는 질겁하여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막대기에서 내려왔고 먹으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원숭이가 비슷한 시도를 했으나, 모두 다 찬물을 뒤집어 쓰고 말았습니다. 몇 번의 시도 후에 그들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연구원들이 그 원숭이들 중 한 마리를 방에서 꺼내고 새로운 원숭이를 집어 넣었습니다. 새로 들어온 원숭이가 막대기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자, 다른 세 원숭이들이 그 녀석을 잡고 바닥으로 끌어내렸습니다. 막대기를 오르려 할 때마다 번번이 다른 원숭이들에게 끌려 내려오던 그 원숭이는 마침내 포기했고 다시는 오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연구원들은 원래 있었던 원숭이들을 한 마리씩 빼낼 때마다 매번 새로운 원숭이를 들여보냈고, 새로 들어간 원숭이는 바나나를 잡기도 전에 다른 원숭이들에 의해 막대기에서 끌려 내려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방은 한 번도 찬물 세례를 받은 경험이 없는 원숭이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원숭이도 막대기를 타고 올라가려 하지 않았고 왜 그런지 그 이유조차 몰랐습니다. 한번 실수하고 한번 겪은 어려움을 운명으로 받아 들이고 "나는 틀렸어. 나는 늙었어. 나는 안돼…"라고 실패와 고난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 들이고 배가 고픈데도 올라가지 않는 원숭이처럼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와 함께 하심이라 우리가 실패를 경험했을 때 잠시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며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 보고 오류를 수정하여 다시 해 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힘들고 어려운 세상, 무서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이지만 다시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일어나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한번 해 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견디어 보겠다는, 승리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실수하고 실패한 것 때문에 고난 겪은 것 때문에, 엄청난 사고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분들이 있을 지 모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 할지라도 목자되신 하나님께 맡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백성들에게 기도요청을 했을 때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직접 갚겠다고 하는 것은 박수 받을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분노하게 되고 치를 떠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겠노라"고 결단하고 살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 할지라도, 악(惡)이 있는 곳에 간다 할지라도 가정과 일터와 학교에서 만나는 해(evil, 惡)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나는 승리합니다. 나는 힘이 들고 어려워도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이 즐거운 일 아닌가"하며 찬송하는 당당함과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땅에 우리를 오늘도 살려 두심은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눈물겨운 사연을 가진 이도 있습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며 목자되신 하나님의 길인도하심으로 합력하여 모든 것에서 선을 이룰 것을 믿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우리는 골짜기로 다닌다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당당함으로 승리의 삶을 선언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2001년 9월 16일 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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