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받기 위한 두 가지 준비
2001-12-24 21:09:17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행10:24)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10장은 신약 전체를 통털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다름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방인들이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도 유대인들만 예수님께 나아와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구원의 역사는 구약시대부터 이방인들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0장이 신약 전체에서 기념비적인 장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성령에 의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의 도에 굴복해서 주님을 영접하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이 10장은 그러한 복음의 불붙는 불길이 이방인들의 사회를 향해서 본격적으로 번져 가는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질서
우리들이 분명히 아는 사실 하나는 10장 바로 앞에는 바울이 빛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를 통해서 이방 선교의 새 장을 열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의 목회자였으며 사도들 중의 우두머리였던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 선교의 장을 여셨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이방 선교를 위해 계속 사역을 했습니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문만 열어주고 열어 놓은 문으로는 사도 바울이 나가서 선교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질서를 보게됩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에 의해 이방 선교의 새 장이 열렸다면 아마 교회는 상당한 혼란을 겪어야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분명히 소명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열 두 제자도 아니었고 열 두 제자와는 별도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사도로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 선교를 위해서 애쓰는 사도 바울과 유다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기존의 사도들 사이에 상당한 갈등들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선교의 문을 열어주는 데에 베드로를 사용하심으로 그가 돌아와서 자기도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정말 율법으로 따지자면 이방인들과 함께 사귀는 것이 옳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를 보여 주셔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끔 문을 여셨다는 소식을 권위 있게 그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이방선교에 대해서 예루살렘교회가 도장을 찍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집회가 이방인들을 위한 첫 번째 사경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성령의 강력한 부으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경회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경회였고 그래서 고넬료의 가정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성령의 강력한 부어주심을 경험함으로서 캄캄한 이방 선교의 역사에 찬란한 불길이 당겨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사경회
고넬료의 가정에서 있었던 사경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첫째는 집회를 인도하는 베드로가 기도 중에 집회를 시작했고, 그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 또한 기도로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기도시간에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의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먹을 수 없는 짐승, 곤충 같은 것들만 가득 있는데 그것을 먹으라는 소리만 세 번 들리고 사라졌으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데 왜 이해를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사고가 편견으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고 이 복음은 오직 유대인들만의 것이라는 것과 그들에게는 구원이 있을 리 없고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는 일이라는 편견이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을까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희랍어 성경에서 '예루살렘에서도 온 유다에서도 사마리아에서도 그리고 또한 땅 끝에서도' 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가 예루살렘이든 유다이든 사마리아이든 땅 끝이든 지금 있는 그 곳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말씀해주셨지만 너무나 두터운 편견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는 들렸어도 이해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시간에 부흥회에 참석할 고넬료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욥바로 내려가면 거기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청하여 사경회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고넬료가 제 구시에 기도할 때에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기도하기로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을 따라서 기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앞서 베드로가 기도한 시간이 6시라고 한 것을 감안해 볼 때 세 시간 이상 계속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한 사람이 인도하고, 기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로 준비하는 ‘마음’
그러면 이제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에 그냥 은혜를 주실 수도 있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라시는가? 우리는 흔히 우리가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면 일방적으로 마음의 문을 여시고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는 이 말씀은 신앙의 인격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신앙이 인격적이라는 것과 기도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인격의 자리는 마음인데 이 마음에는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의지 즉 지,정.의가 있어 그것들을 움직이는 중심 사령부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을 통해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해를 통해서 마음으로 내려가고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나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여서 인생을 변화시키기에 이릅니다. 마음이 바로 변화의 통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머리로 들어가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인격으로, 인격에서 삶으로 옮겨가며 한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핏 길을 따라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마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 메시야이고 이 복음을 너희에게 전한다." 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준비되지 않는 마음의 길을 내기 위해서 온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깊이 회개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음성을 듣고 자신들의 마음의 잘못된 것을 고치고 삶을 고치면서 메시야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게끔 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준비된 마음을 타고 흘러 들어옵니다. 기도하던 사람에 의해서 인도된, 기도한 사람이 참여한, 그 사경회에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은 오래도록 기도하면서 마음의 밭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운 밭으로 기경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중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영혼의 상태가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사모한다고 하더라도 심겨지는 말씀보다는 놓치고 흘러가는 말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듣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마음의 많은 패역과 굴곡, 거친 마음,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 이런 것들이 다 그 기도의 눈물을 통해서 무너뜨려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높은 교만은 낮아지고 주저앉아 절망하는 마음들은 절절히 돋우어지면서 평평한 땅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떠오르면 자신의 마음 어느 구석에든지 안 비치는 곳이 없이 하나님 앞에 준비된 마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인격적’기도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요행수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기도가 한계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식이 깊고 풍부하게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드릴 말씀도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인식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한 자식이 아버지에 대한 인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아버지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만 요구하게 된다면 얼마나 비인격적인 관계가 되겠습니까? 이처럼 비인격적인 기도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그것은 청구서만 하나님께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적인 기도는 입으로만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타내야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아뢰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적인 기도에는 자기 비추임이 있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깊이 깨닫게 해줍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 기도 제목을 통해 나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며 나의 필요만 채우는 기도제목이 아닌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갈망하며 내가 정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지를 풍성한 말씀의 빛에 비추어 보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의 기도가 풍성하고 인격적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나게 만드십니다. 공부를 할 때 예습을 하고 가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게되기 때문에 어디에 더 집중해야 될지를 알고 그것에 대해 손들고 질문할 수가 있는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여러분들이 깊이 기도하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절대로 필요 없는 것 일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하십시오. 이런 것들을 부수고 또 새로운 인식이 깨어나게끔 만들어 주는 중요한 수단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흘리는 그 눈물은 설교를 잘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케 합니다.

'열린’사경회
두 번째로 이 고넬료의 가정에 은혜가 넘친 것은 고넬료가 사람들을 다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24절에 보면 "이튿날 가이샤랴에 들어가니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라고 기록한 것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가와 친구들을 모두 모은 열린 사경회였으며 그리고 또 하나는 기다리던 사경회 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선 두 번째로 이 사건의 특징은 고넬료 한 사람만의 사경회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한 사람은 고넬료 한 사람이었지만 그런데 고넬료가 데리고 온 사람들 모두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를 한 사람이 그 사람들을 인도해서 데리고 오면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렇게 인생에 벼랑 끝에 섰다가 주님을 만난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위기가 변하여서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벼랑의 끝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지금 그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함께 나와 하나님을 만나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생 자체를 새로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보면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들은 별과 같이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눈을 들어서 우리의 주위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가, 우리의 친척 그리고 우리의 친한 친구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말하기를 "그런 사람들이 불쌍하지 않느냐! 만약에 불쌍하지 않다면 당신이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집회를 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다음에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일가와 친구들을 다 모았습니다. 여기는 그 이야기가 나오니 않지만 고넬료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 시몬 베드로를 초청하는 이 사경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달래고 구슬려서 어떻게 하든지 이 축복된 자리에 참여 시켜야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이었던 일가와 친구들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이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인생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동안 우리의 일가 우리의 친척, 우리의 친구, 우리의 직장의 동료,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내게도 그 피묻은 복음을 들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우리의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물붓듯 성령의 은혜를 부으시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사람들을 가득 채워서 이 피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기다린’사경회
마지막으로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기대를 가지고 고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경회였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듣기에 앞서, 이 시간들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원하는가하는 생각들을 먼저 정리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아, 내 힘으로 몸부림쳤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주님의 음성만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좋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만 주시면 순종할 각오가 되어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환경도 열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것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만나기를 더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고대하는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길을 열어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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