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기를 힘쓰는 교회
2001-12-14 11:32:49

(골로새서 1:28-29)

어떤 사람이 세계를 제패하려고 힘썼던 알렉산더 대제를 가르쳤다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384-322B.C.)에게 묻기를 '교육받은 이와 교육받지 못한 이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단호하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다름 같다'고 하여 얼마나 교육이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 주었습니다. 현재 영국의 수상인 토니 블레어는 정부의 세 가지 주요 역점 사업을 말하면서 '교육, 교육, 교육'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만큼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사에 있어서 교육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지도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인 골로새서 1장 28-29절에서도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하여 교회에서도 교육이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장석교회는 이런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닫고 교회 교육주일을 제정한지 올해로 35번째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 결정한, 정말 선각자적인 결정이었고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크게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허울 좋은 역사만 가지고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다운 교육이 정말 이루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교육의 우선 순위는 어린이 교육입니다. 한국교회의 현황을 보면 전교인의 85%가 주일학교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거나 다녔던 연고로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때 교회를 접하고 예배를 접하고 찬양을 접했기 때문에 그들이 나중에 커서 교회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한국교회는 어린이가 70%, 청소년이 15%, 청년이 10%, 장년이 5%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반대현상입니다. 장년이 70%, 청년이 5%, 청소년이 7%, 어린이가 13%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분포입니다.
교육의 효과는 나이가 낮을 수록 좋습니다. 시카고대학의 벤자민 교수는 '인간은 1세에서 8세까지 교육의 85%는 이미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8세 이상은 이미 치료교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옥토와 같습니다. 뿌리는 대로 100%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어린이 전도는 황금어장과 같습니다. 작은 노력으로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유치원 때는 100%를 유대인으로 만들 수 있고 초등학교 때는 50%, 중고등학교 때는 10%, 대학교 때는 5%, 장년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은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므로 교육학자와 심리학자의 통계를 뛰어넘어 많은 청장년들도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대부분 어린이에게 뿌린 씨앗을 장년부에서 걷는 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린이 전도와 교육의 중요성을 항상 잊어서는 안됩니다. 잠언 22장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이 때에 받은 교육은 늙어도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연어라는 물고기를 보시면 새끼 상태인 치어들을 동해 앞 바다에 놓으면 2만리나 되는 먼 곳으로 나갑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자랍니다. 다 자란 고기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다시 떠났던 그 자리로 돌아옵니다.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연어와 같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옛날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올바른 신앙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회는 우선 순위를 두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 교육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의 장은 가정이다. 가장 위대한 교사는 부모이다. 교육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목사요 교육사상가였던 부쉬넬(H. Bushnell)의 말입니다.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나무라 하더라도 죽으면 썩게되고 제 구실을 할 수 없게됩니다. 잘못 생겨도 살아있는 나무여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이나 지식만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에게 참 생명의 진리를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가르쳐지는 곳에서 올곧은 인간이 성장하게 됩니다. .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여 성경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음을 말씀하였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배우면 우리 안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말씀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모든 믿음의 가정들이 가정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하고 교회는 더욱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초점을 두고 교육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교육되도록 힘써 가르치며 기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교육은 우리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능력이 우리 안에 함께 하심으로만 가능한 교육입니다. 교육학자나 주장하는 사람에 따하 교육에 대한 견해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육이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입니다. 학교란 사람을 만드는 곳이요 교회란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입니다. 이런 교육에 대하여 반대하고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계주의적인 교육으로 건강한 인격이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견해는 교육이란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르는 일' 즉 피교육자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라도록 돕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자진 안에 감추어 있는 소질이나 개성을 충분히 발달시켜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 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사람됨은 그 자신 안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의 견해가 물건을 만드는 목수의 일이라면 2)의 견해는 곡식이나 우 양을 기르는 농부나 목자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도록 하는 교육 방법은 오늘에 와서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국 같이 자유롭고 여유 있는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오늘에 와서 괴상한 인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들은 일체의 전통적 윤리를 거부하고 괴상한 삶의 현상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식인종 추장이 일찍이 영국 런던에서 대학 과정을 마치고 고향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개한 식인종으로서는 현대문명을 몸소 익히고 미개지인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났습니다. 식인종과 함께 런던에서 공부했던 젊은 학자가 아프리카에 여행을 갔다가 식인종 추장이 된 학사 출신의 식인종과 정글 속에서 만났습니다. 추장은 기쁘다는 인사부터 했습니다. "미스터 윌리엄, 이거 반갑군. 자네 같은 문명인을 오늘 저녁때 우리 마을 식인종들과 함께 요리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니--" 그 말에 윌리엄은 금새 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윌리엄은 죽을 때 죽더라도 우선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직설적으로 정면 공세를 했습니다. '아니, 자네는 영국 유학까지 한 사람인데 아직도 야만인의 티를 벗지 못하고 식인종 노릇으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인가, 자네는 문명 사회에서 배운 것도 과연 없다는 말인가?' 그러자 식인종 추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 말씀, 문명 사회에서 나는 배워온 게 있다네. 이제는 사람을 먹더라도 문명사회에서처럼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고 있단 말일세.' 지식만으로 참 교육이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견해는 교육에 대한 마지막 견해가 있습니다.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입니다. 특히 기독교 교육은 만나는 일이 가장 소중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좋은 실례로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학식이었습니까? 그의 율법 엄수의 정신이었습니까? 그의 문벌이었습니까? 그런 것들이 모두 어느 정도의 영향을 그 인격 안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영향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와 만난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아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었던 그 심각한 체험, 즉 예수와의 대면 바로 그것이었음을 성경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이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동안 예수님을 만나 주님을 닮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과 사랑을 배우며 그 거룩한 삶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단순히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격을 알게하고 주님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경주석가 메튜헨리는 9살에 예수님을 만났고 에드워드 신학자는 7살 때에, 청교도 설교가 리차드 박스터는 6살 때에, 폴리캅은 9살 때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에 바로 배우고 만남을 경험한 교육을 통하여 위대한 신앙인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교육을 담당한 교사들은 오늘 29절 말씀에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는 말씀에서 바울이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가르친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육은 참으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온전히 할 수 없습니다. 좋은 교사란 구원받은 확신과 감사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먼저 가르치는 사람이 구원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그런 교사들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고 자원해서 충성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중국의 속담에 "비뚤어진 둥지에 온전한 달걀은 있을 수 없다"고 말처럼 바른 신앙을 가진 교사 밑에서 바른 신앙인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무디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스턴에 있는 구둣방에서 일하고 있을 때 킴볼이라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찾아와서 손을 꼭 붙잡고 기도할 때 무디는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때 전도한 한 어린이가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구두방 점원이 성령의 능력을 받자 그는 1천만 명 이상을 구원하는 대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참교육의 시작은 건물이 없어도,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근세 교육의 아버지라는 페스탈로지 전기를 읽은 바 없어도, 국가가 주는 교사의 면허증이 없어도, 보수가 없어도 사명감과 정열만으로 뭉쳐진 아마츄어 선생님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가르치는 교육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교사들이 있는 한 교회 교육은 생명을 이어갈 것입니다. 장석교회 교육이 바로 이런 교육이 되어 방황하는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생명을 주는 교육 현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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