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8:1-8 / 습기가 없으므로Ⅱ
2001-12-14 10:04:47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 8:1-8)

구호뿐인 인생
"푸른 낙타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푸른 낙타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러한 문제가 주어지면 민족마다 국가마다 다르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은 푸른 낙타를 우선 낙타의 게놈(GENOME) 지도를 작성한 후 유전자 변형을 통해 황토색을 푸른색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로 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은 박물관과 문헌을 통해 과거에 푸른 낙타가 있었는지 또 돌연변이로 색이 푸르게 변한 적이 있는지 살핀다고 합니다. 이태리인들은 좀 간단하게 해결합니다. "뭐 그럴 거 있느냐. 야, 파란물감 가져와라. 칠하자!" 반면, 한국사람은 더 쉽게 이 일을 해결한다고 합니다. 몇 사람이 나가서 "푸른 낙타 나와라!" 하는 구호를 외친답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농담인지 외국에서 만든 조크인지는 잘 모르지만 만약 외국에서 이런 농담을 만들었다면 우리에게 굉장한 멸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말이 사실인 것이 정치도 구호만 있고, 남이나 북이나 구호 천지입니다. 무슨 사대개혁이다 오대개혁이다 하는 구호 속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밀려온 것 같습니다. 게다가 데모훈련까지 되어서 '나와라!' 하며 앞에서 선동하는 것이 요즘 우리 민족이 일하는 모습입니다.

성장의 중요한 요소-습기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씨앗이 엷은 흙으로 덮인 돌밭에 떨어지고 싹이 잘 텄지만 뜨거운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자 시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습기만 보충해 주면 나무들이 서로 공생할 수 있습니다. 아마존 밀림 같은 지역에 가보면 아침에 꼭대기에 맺히는 이슬만 가지고도 자라는 많은 생물들이 있습니다. 습기가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수경재배 단지에서는 습기만 공급된다면 식물들이 '뜨거운 태양아, 떠오르려면 올라라. 나는 엽록소를 더 많이 만들 것이다.'라고 외쳐대며 계속 습기를 공급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습기
우리에게도 습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습기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 앞에 우리의 삶을 세워보면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습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께서 내 생애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을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습기가 우리 신앙생활에 필요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께서 주신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된 세상과 심령을 향해서 긍휼의 눈물을 흘리는 이 습기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과 은혜와 자비를 더욱 온전히 누리는 놀라운 통로가 되어집니다. 그리고 또 다른 습기 하나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봉사와 수고의 습기입니다.

땀흘리지 않는 신앙생활
예수 믿으면 우리는 어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어린 아이로 태어나게 됩니다. 한국 교회가 많은 평신도 양육에 실패했던 제일 큰 이유중의 하나가 지성인이 교회에 들어오면 그가 모든 것을 알 것이라 생각해서 그들의 영혼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공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박사가 예수 믿으면 박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아이로 태어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우유와 이유식을 공급하는 시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사회적인 신분이나 학력이 어떠하든지 함께 가족처럼 성경공부 하자고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성경 공부의 기회를 많이 만들어서 영혼 영혼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게 하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10년 20년 하다보면 문제가 되는 증세가 나타납니다. 바로 영적 비만입니다. 좋은 강의와 성경공부, 그리고 여러 학습 프로그램을 수료한 사람들은 영적 비만으로 움직일 줄도 땀흘릴 줄도 모릅니다. 구호만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런 사람들이 좋은 것은 또 잘 압니다. 목사가 설교를 은혜스럽게 했는지 안했는지는 잘 압니다. 그렇지만 그 은혜스러운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 어떻게 역사하는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땀흘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두가지 방법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나비와 같은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백화가 만발한 꽃밭에 나비는 그저 사뿐히 옮겨다니며 향기와 맛있는 꿀과 이슬들을 한껏 섭취하면서 늘 이곳저곳 즐겁게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똑같은 곤충이지만 벌과 같은 신앙생활도 있습니다. 애쓰고 수고해서 계속 날아다니며 따서 모으고 또 모읍니다. 쓰일 날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수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며 얼마나 열심히 일했던지 피곤한 몸을 배 고물에 기댄 채 잠드셨습니다. 그때 마침 무서운 풍랑이 불었습니다. 그렇지만 노도광풍도 육체가 피곤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을 만나 하나하나 안수하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의 심령을 끝까지 쫓아가 주셨습니다. 저들이 배가 고프면 먹을 빵을 공급해 주었고, 아파서 고통받는 사람을 일으켜주시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일을 위해서 동분서주 하셨습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땀흘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기뻐 받으실 봉사의 땀
이 봉사의 땀, 이것은 신앙성장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자동차는 네 바퀴가 있어야 달립니다. 그것처럼 신앙생활도 말씀과 기도와 전도와 봉사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균형 잡힌 신앙으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들이 대교회로 성장하면서 땀흘리지 않고 책임 없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감격도, 보람도 없이 그냥 교회에 나갑니다. 그냥 그 시간을 한번 때우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책임 없는 인생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천성이 게으르기 때문에 게으름을 죄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참 저는 본시 게으르기를 즐겨 해서 뒹굴거리며 즐기는 것 좋아하고, 그림 보는 것 좋아하고, 음악 듣는 것 좋아합니다. 저는 일을 싫어하는데 일이 저를 좋아하여 쉴 수가 없는 것이 저에겐 고통이라면 고통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악하고 게으른 영혼아."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판단을 받는다면 그 영혼이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며 일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땀흘리지 않으면 인생의 가치가 없어지고 우리는 그냥 생존하는 물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땀이 없는 그 인생에서는 보람과 가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회사를 위해 수고하고 땀흘리고 봉사하는 것이 소중한 것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날 구속하신 주를 위한 그 수고의 봉사, 그 땀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십니다.

인간의 죄로 시작된 죽음
신앙생활에 새로운 능력을 갖고 싶습니까?
그러면 내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가, 습기가 있는가를 살펴 보십시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또 다른 습기를 경험합니다. 그 습기는 내가 가진 습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게 주신 습기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첫 인류를 맘껏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라는 본분을 주셨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비행기와 배와 기차가 각자의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 본분이듯이 우리 인생의 본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에게 하고 싶은 것을 맘껏 누리게 하셨지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전제 하에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단 하나의 실과만은 먹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아담과 이브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것은 그 실과 하나뿐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계율을 어기면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들에게 그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그 선악과를 먹었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죽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후로 인간에게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육체의 죽음
죽음이라는 것은 전쟁의 중단이나 멸절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물질에 보존의 법칙이 있듯이 영혼에도 불멸의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어서입니다. 만일 죽음이 끝이라면 인생은 간단합니다. 못 죽으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혹시 내세가 있나 해서 헛짓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제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마지막에 천사처럼 빛나는 얼굴로 하나님 품에 안긴 그 모습으로 임종하셨습니다. 제 아버지 어머니를 담고 있었던 육체라는 그릇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고 아버지 어머니는 안 계셨습니다. 의사는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속죄제
우리에게 또 다른 죽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분과 연결되지 않는 분리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 에베소서 2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 :1)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죄가 가로막았고, 허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인생은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죄 안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늪이나 눈에 빠지면 사람들이 살아나기 위해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러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깊이 빠집니다. 아무리 애써도 늪이나 눈에서도 못 나오는 인생을 사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하물며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와 멸망의 구덩이에서 누가 스스로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이 하는 방법을 구약에 제정해 주셨습니다. 죄를 없애고 싶은 사람은 '속죄제'때 소나 양, 또는 염소를 준비하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산에서 비둘기를 잡아서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제사장 앞에서 그 제물에 손을 얹고 밤새 기도합니다. "이 짐승이 나를 대신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짐승의 심장에 구멍을 뚫어서 피를 모두 뽑아낸 후 살을 각을 떠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이 짐승을 대신 올렸습니다. 하나님! 피흘림 없이는 사하심이 없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이 피를 주님 보시옵소서." 이러한 마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2000년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의 구속주가 되실 것인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상징에 불과했습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구속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점과 티도 흠도 없이 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 분은 죄 없이 사셨기 때문에 남의 죄를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죄를 범했다면 '죄를 범하면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씀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정결한 분이었기 때문에 남의 죄를 대신할 수 있었고, 그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역사속에 숨쉬고 있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5) 죄를 용서받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죄값을 치르든지 그렇지 않으면 죄를 범한 그 사람에게 용서받는 방법입니다. 죄지은 사람이 숨어 다니다 붙잡히면 "차라리 내가 죄값을 치르는 게 낫지"하며 안심한답니다. 이 두 가지 방법 이외에는 죄가 용서될 수 없는데 놀라운 일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죄값이 치러졌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화목제물로 받으셨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할 수 없어. 그러나 너희 대신 피흘린 사람 때문에 용서한다.' 이러한 놀라운 구속을 우리들은 힘입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우리 죄가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모두 처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 형벌은 십자가 위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더 이상 죄의 용서를 위한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4)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한 인생을 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의 피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새로운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색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을 색맹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색을 안타깝게도 못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친구인 한 목사님은 파란색을 못 봅니다. 그런데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파란색을 볼 수 없으니 신호에 번호를 붙여 색을 구별합니다. 1번은 돌아가는 것, 2번은 직진, 3번은 멈춤이라는 식으로 번호를 매기는 것이 색맹을 가진 사람을 위한 배려입니다. 그런가 하면 제 친구중 한 녀석은 평생 노래라고는 하나밖에 못 부릅니다. 절대로 노래하지 않는데 노래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바둑 두다가 자신이 이겨간다고 생각하면 콧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노래인지는 오리무중입니다. 그러다 진짜 이기면 가사까지 붙여 부르는데 그때야 이친구가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노래냐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입니다. 이런 사람을 음치라고 합니다. 똑같은 눈을 가졌고 시력이 2.0인데도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그처럼 좋은 목의 구조를 가지고도 노래를 못 부르는 음악에 대해서 닫힌 인생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죽은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반응이 없는 사람, 바로 영치 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그 죄의 무게 앞에 우리는 무기력하고, 절망했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하셨습니까? 그분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용서의 자리 앞에 믿음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얻는 것이 은혜입니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써서 얻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가이고, 보상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어주신 그 은혜. 이런 놀라운 은혜를 가지고 성소 앞에 담대히 나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주께서 구속하신 것은 은이나 금이나 없어질 것이 아닌 점도 티도 흠도 없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사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사실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바라보십시다.

효율을 따지지 않는 사랑
성만찬 행할 때마다 우리들은 주께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내 피로 새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피는 먹장처럼 검고 진홍처럼 붉은 죄가 흰눈처럼 양털처럼 깨끗이 씻김을 받은 확실한 증표입니다. 우리들은 이 보배로운 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왜 제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피흘리게까지 하며 사랑하는 대상이어야 합니까? 왜 내가?" 하며 의아해 할지 모릅니다. 그 피를 바라보면 제가 하나님이라면 절대로 용서 못할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저입니다. 그저 안 믿으려고 도망치고, 믿음 다음에도 또 넘어졌던 저입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이 세상 의 효율로 생각하면 이런 바보 같은 투자는 없습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 놀라운 투자 앞에 "하나님 왜 내가 하필 그 대상입니까?" 그러다가 "우리 하나님 바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효울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투자가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바보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 앞에서 바보입니다. 자식들 때문에 집칸이 늘어갑니까, 먹을 것을 제대로 먹습니까, 잠잘 것을 제대로 잡니까. 누군가 100분의 1만 배반해도 길길이 화를 내면서 원수될 그런 일들을 자식이라는 이유로 계속 투자하고 계속 사랑하는 바보가 바로 부모입니다. 자식 앞에 바보 아닌 사람 없습니다.

보배로운 피의 습기
보배로운 피를 볼 때마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의 습기에 젖어 있지 않으면 모든 성경공부는 이론에 그칩니다. 그의 피에 적셔있지 않으면 기독교는 윤리의 종교로 끝나고 맙니다. 그 피의 놀라운 능력이 수혈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놀라운 구속을 우리가 갖게 되었습니다. 나를 위한 보배로운 피의 습기를 믿음으로 신뢰하고 사십니까? 그 습기가 흘러가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인입니다. 그 습기가 흘러가고 있는 한 모든 죄는 자백하자마자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진 것을 믿으십니까? 그 습기가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한없는 용서를 베푸십니다. 그 피가 있는 한 하나님은 나를 향해서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그 습기 앞으로 나오십시오. 자란 씨앗에 습기가 필요합니다. 회개의 눈물, 감격의 눈물, 긍휼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습기가 필요합니다. 봉사와 땀의 습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 언덕에서 흘려주신 그 보배로운 피의 습기가 마음속에 관통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감격하고, 힘을 얻는 습기의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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