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8:4-15 / 변장된 축복 2001-12-14 10:02:47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 8:4-15) 우리들은 이 고비만 넘기면 만사 형통하리라 생각하고 그 고비를 맞습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큰 고비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순풍에 돛달고 갈 생애일 줄로 생각하고 그 문제를 애써 수고했더니 어느새 그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우리 앞에 다가섭니다. 이것만 소유한다면 세상에 다른 소원이 없을 것 같아 노력해서 그것을 소유했는데 소유하자마자 더 큰 갈증을 느낍니다. 바다에서 갈증 때문에 물을 마시면 더 갈증이 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결혼해서 아이 키우느라 정신 없는 북새통에서 시집, 친정어른들 보살피고 모든 장례식이 끝나 보니 내 장례식만 남았더라...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문제도 끝날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돌아가실 때. 그때는 확실하게 끝납니다. 그러나 그 이외에 문제는 계속됩니다. 마치 바다에 파도가 끊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문제 많은 인생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고통이 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흙이 얇은 돌밭에 뿌려졌습니다. 잠깐동안 힘차게 자라다가 태양이 떠올랐을 때 모든 자람은 중단되고 말라 비틀어져 버린다고 하면서, 그것을 설명하신 주님께서는 말씀을 받은 자가 잠시 자라다가 말씀으로 인한 환란을 견디지 못해서 무너지는 생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인생에 얇은 흙 같은 마음 있다면 어떻게 그 환란이라는 무거운 돌을 이기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주께서 주신 아름다운 신앙을 키워갈 수 있을까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고난의 인생을 살면서 주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경건함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건함이 세상 속에 들어가면 세상은 그것을 뱉어내기 위해 계속해서 거부합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이 인생을 산다면 모를까, 다른 신앙을 가지게 되면 세상은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살전 3:3)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도록 세웠다고 합니다. 환난 없는 생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워 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환난을 당하도록 주께서 우리를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주께서 먼저 그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고난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마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8절에 주께서 친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라고 하셨습니다.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이물질이 들어오면 밀어내는 것처럼 세상이 우리를 거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일을 참 많이 봅니다. 한 공무원이 공무원 사회의 풍조를 거슬러서 살기 시작하는 어느 날, 사람들이 그를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술을 많이 마시는 시대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에서도 과거에 보지 못했던 술마시는 풍조를 자주 보게 됩니다. 20대 초반의 아이들이 대학만 들어가면 술부터 배운다면서요. 이상한 세태 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거부반응으로 고통받습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 믿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러 가서 제가 머리 숙여 기도하고 있으면 친구들이 제 머리를 톡톡 치면서 "야! 밥을 앞에 놓고 졸기는 왜 졸아?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도 많이 맞고 친구들과 식사할 때마다 핀잔을 들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요 15:20)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은 너희도 계속해서 핍박할 거라고 합니다. 예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너희의 말을 똑같이 듣고 지킨다고, 종이 그 주인보다 클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통스런 세상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핍박마저 더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핍박당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1-12)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말씀 속에서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첫째는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욕과 핍박을 당하고 거짓으로 악한 말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이전의 믿음의 선진들과 동일한 신앙에 섰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그처럼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도바울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가짜 사도라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도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목사님이 예수 믿게 된 후 나병 환자들을 섬기고 있을 때,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해 일제 감옥에서 죽을 고비를 당합니다. 8월 26일이 그분의 사형일 이었으니 1945년 9월이면 그분은 세상에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8월 15일 해방이 되어 그 분은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니 서울과 부산의 유명한 대형 교회들이 그 분을 담임목사로 모시기 위해서 쟁탈전을 벌일 때, 목사님은 "나는 내 형제들에게 가야합니다."하시며 여수 애양원 나환자촌에 가 사셨습니다. 여수 순천 반란사건 때는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이 동신이가 비참하게 시체로 변합니다. 목사님은 자기 아들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 후 6.25가 닥치자 사람들이 목사님을 위해서 배를 준비해 두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배를 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먼저 구하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배를 탔고, 배가 한참동안 육지에서 떠나다 보니, 손양원 목사님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떠나가는 배에 손을 흔들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깜짝 놀란 나환자 장로님들이 "아니 목사님이 떠나셔야지요.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배인데요."하자 손양원 목사님께서 "목자가 양떼를 두고 어떻게 떠납니까?"라며 남아계셨습니다. 그 분은 공산당들에게 무지막지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중국에서 심천이라는 곳에 들렀을 때입니다. 미군의 학살이 있었던 장소에 역사박물관이 있는데 그 안에 6.25전쟁 당시 미군의 잔혹성을 보여주기 위한 사진과 물건을 전시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 역사박물관은 아펜셀러, 언더우드, 메디슨과 같은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사진으로 시작해서 김일두 목사님의 사진도 전시해 놓고, 성경책이 있는데 거기에 미제 앞잡이들이 우리나라를 침입하기 위한 도구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걸 둘러보시던 한 장로님께서 "당신들, 이 초대 선교사들이 얼마나 우리민족을 위해서 애쓰고 고난 당한 줄 아는가? 선교사중에 나쁜 선교사도 있는데 왜 하필 이 사람들 사진을 붙여 놨는가?" 하시며 처음부터 날조했기 때문에 다음 것들이 진실이라도 다 날조같이 보인다고 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북측에서 "그래도 미군이 얼마나 잔학했는 줄 아십니까?"하니 "인민군도 그랬어요."하시더라구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북측이 인민군이 그랬냐고 물으니 장로님이 대표적 인물로 손양원 목사님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임 당한 줄 아느냐고 하셔서 저는 평양에서 나오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북한에서 가는 곳마다 북측의 역사 왜곡만 보면 저희가 정확한 자료를 갖다대는 통에 북한 사람들이 참 혼났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고난 받을 이유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신앙이 좋으면 형통 하다는 말이 그 분에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고 보배 되신 주님의 영광스러움 때문에 어떤 손해도 감내하는 믿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영광이고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환난 당할 때에도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갔던 그 길에 내가 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환난은 우리가 가게 될 영원한 처소를 처소가 어디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2)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입니까? 하늘입니다. 만일 우리의 세상에서 복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해 간다면 마음으로 하늘을 사모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너무 좋은 사람들은 천국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맞는 좋은 것보다 몇 천억 배로 좋은 천국을 마련하셨기 때문에 조그만한 성공과 기쁨과 환경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때는 환란과 고통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천국을 보라고 하십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환란이 없으면 죽고 싶은 생각도 없어집니다. 아니, 주님께 갈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될 천국에서 상이 기다립니다. 그냥 그냥 살다가 끝나는 인생이어서는 안됩니다. 노벨상보다 억천만 배 더 영광스러운 상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상주시는 이를 믿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은 주님이 이 땅에서 당하셨던 고통의 발자취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거슬리는 모든 악한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신 고통의 길을 우리가 뒤따라갑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면 자신이 지혜스럽지 못해 당하는 고통을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통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자신의 성질이 나빠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겪는 고통을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라고 호도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다릅니다. 고통 당한다는 결과는 같을 수 있지만 전적으로 다릅니다. 고통 당할 때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부분이 없는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 시험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첫째, 우리는 당한 시험만 당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사탄이 굉장히 영리하고 능력이 많은 것 같아도 못하는 게 있습니다. 창조를 못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했던 것만 반복합니다. 예수 믿게된 사람이 제일 먼저 당하는 시험이 무엇이냐면, 지금부터 주님의 날을 잘 지켜야겠다고 결심하는 그 주일날 아침에 꼭 피할 수 없는 손님이 집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반드시 큐티 하리라 결심을 하고 시간을 정해 놨는데 그 시간 직전에 꼭 중요한 전화가 와서 나로 방해합니다. 사탄이란 놈은 그렇게 교묘합니다. 그런 시험으로부터 시작한 많은 시험들이 닥치는데 그 시험들은 이미 이전에 다른 사람이 당했던 시험의 반복입니다. 시험 당할 때 이 세상에 나만 홀로 이 고통을 당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가장 절망스럽게 만듭니다. 그 절망스러움이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똑같이 당했고 이겨냈다 하면 고통이 별게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이 세상에서 혼자만 출산의 고통을 갖는게 된다면 이겨낼 사람이 없습니다. 저와 함께 6년 동안 충성스럽게 일했던 자매가 시집을 가서 이제는 만삭으로 출산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제가 건강하냐고 물으며 두렵니 않냐고 하니, 두렵다곤 하지만 실제로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친구들도 다 시집가더니 아이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당하는 시험이라면 절망스럽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당했던 시험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나도 이길 수 있다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시험은 당한 것만 당할 뿐 창조는 없습니다. 세상에 혼자만 당하는 괴상하고 이길 수 없는 시험은 없습니다. 단지 사탄만이 '하나님이 너 버렸어. 그러기 때문에 너만 세상아무도 당한 적 없는 고통을 당하는 거야."라고 속삭일 뿐입니다. 당한 시험만 당합니다. 두 번째, 시험 당할 때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미쁘사."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로 미쁘사를 '어여삐 여기사' 로 생각할 수 있는데 아닙니다. 영어로는 faithful.믿음직스럽다는 말입니다. 약속을 철두철미 지키시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는 뜻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때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환난 때에 약속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1)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녀의 환난 날에 큰 도움이 되십니다. 미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9:9) 환난 때 나를 지켜주는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내가 당하는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나의 도움이 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세째,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고전 10:13) 감당치 못할 시험은 안 주십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실력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초등학생에게 중학생이 감당할 시험을 안 주시고 고등학생에게 대학생이 감당할 시험을 주시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기도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마음에 소원만 품어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해도 안 주실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유를 몰라 ' 하나님, 제가 이렇게 기도하는데 왜 안주십니까?' 라고 기도하는 중에 조지 뮐러의 가르침 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심으로 축복하셨지만 쉽게 응답해 주지 않음으로 나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게 해서 기도하는 인격을 만드셨습니다. 어린 자식에게 부모는 무엇이든지 쉽게 해줍니다. 제가 남서울 교회 처음 개척했을 때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문제가 어렵게 꼬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야, 하나님께서 나를 대단하게 여기시는데!!"라고 생각하며 안심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선배 중에 이런 분들이 계셨습니다. 전도사 두 분이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일제 재판장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한 분은 8년을, 한 분은 6년을 언도 받았습니다. 선고가 내려질때 6년 언도 받은 분이 8년 언도 받은 분을 향해 "형님. 참 좋겠수다. 천국에서 상이 크니 좋겠수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된 모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시험을 주셨데 자신의 연약함으로 감당치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성경과 달리 영어 성경과 히브리어에는 이 말씀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피할 그 길을 내사' 앞은 홍해고 뒤에는 애굽의 대군이 물밀 듯 밀려오고 있습니다. 모두들 죽게 되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 14:13) 그가 지팡이를 내밀자 그 앞에 한 길이 나타났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피할 그 길을 내사 라는 말씀을 듣고 이 아름다운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에 하나님께서 내주시는 길.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갓 결혼해 신혼 재미를 누리고 있던 어느 날, 사랑하는 남편에게 나치로부터 징집 요구서를 받게 됩니다. 악한 정권의 세력을 따를 수는 없고 듣지 않으면 가스실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하던 마리아가 자기 수녀원 원장에게 찾아가 의논합니다. 그 수녀 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대문을 닫으실 때는 창문을 열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남편은 탈출을 감행합니다. 시험 당할 때마다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을 늘 마음에 두십시오.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케 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 영광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치욕스러운 것, 귀한 것뿐만 아니라 천한 것, 기쁜 것뿐만 아니라 슬픈 것 이 모든 것이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을 이룹니다. 국수 가락 뽑아내는 걸 보면 동그라미 국수틀을 지나가는 반죽은 동그라미 국수 발이 되고, 네모 국수틀을 지나가면 어떤 모양의 반죽도 저 밖에서는 네모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환난이나 핍박이나 치욕스러운 것, 자신의 약점까지도 합력해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선을 이루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환난날에 늘 읽어야 할, 가슴에 담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우리 주께서는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기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환난을 주님과 함께 이길 것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환난 날에 부를 승리의 개선가입니다. 그 예수 안에서 이겼던 승리의 노래를 보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1-39) 이것이 환난 날에도 승리케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들은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인생을 살면서 늘 승리하시고, 시험 때 무너져 말라비틀어져 죽는 신앙이 아니라 그 시험 으로 더 영광스러운 열매를 주 앞에 맺어 하나님 앞에 찬송과 영광이 되는 생애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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