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나는 신앙 2001-12-13 20:00:22 2001년 2월 4일 출 33:17-23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을 찾는 역사이다 우리 인간의 모든 참다운 삶은 만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만남을 경험하며 살아오기도 했지만 앞으로도 무수한 만남을 가지면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배우자를 만나는 일, 부모와의 만남,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스승과 친구와의 만남, 학교와 교회와의 만남, 교인들과 목회자와의 만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좋은 만남의 기준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만남 이후에 우쭐거리거나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불만과 불평을 한다면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만난 이후에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한없이 작아보이고 허물투성이로 느껴진다면 행복한 만남입니다. 어떤 노래가사중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 속에는 굉장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커보이고 나는 작아보인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신앙고백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특별히 그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에 하나님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나는 왜 이렇게 죄인으로 느껴지고 부끄러운 존재일까?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부끄러워하신 적은 없습니까? 우리 인간은 자신과 남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안과 밖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부지런히 힘을 씁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평생 살면서 언제나 올바르게, 떳떳하게 살았다"고,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고의이든 실수로든 옳지 않은 일을 하다가 남에게 들켜서 부끄러움을 겪은 적은 없습니까? 남들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옳지 않은 모습을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남들이 나를 칭찬하고 존경해도 나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남들도 아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 나만이 아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이미 드러난 부끄러움이라 할지라도 어찌하든지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감추어보려는 마음이 앞섭니까? 아니면, 드러난 것보다 더 못한 것이 실제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부끄러움을 교훈 삼아 앞으로 다시는 그리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려는 인간의 열심과 열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자랑보다는 자기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을 보면 모세와 하나님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는 인간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이런 요청을 합니다. “하나님, 주의 영광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 영광을 보고 믿겠나이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잘 알고 있으니,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 네가 요청한 것을 들어주겠다. 단, 네가 내 영광을, 내 얼굴을 보여달라고 했지만, 나는 내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한테 은혜를 베풀고, 내가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여 주지는 않겠다. 내 얼굴을 본 자는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얼굴을 보여 달라고 하지는 말아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지도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확실한 얼굴을 보고싶어 했습니다. 은혜를 베풀고, 자비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심을 베푸는 하나님, 그분의 얼굴을 확인해야 내가 확신을 갖고 이 백성을 이끌겠고 이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한결같은 대답은 얼굴을 보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는 하겠지만, 나의 얼굴을 보여 주지는 않겠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을 찾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분의 얼굴을 누구나 보고 싶어합니다. 어쨌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분을 보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십니다. “내 얼굴은 절대로 보여줄 수 없다. 내 얼굴을 보는 사람은 죽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얼굴은 영광이고, 또 하나님의 나타남은 거룩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만든 틀을 가지고, 인간이 그릴 수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내 얼굴을 상상하지 말라. 사람이 이성을 통하여 최고로 합리적인 모습을 그려보았다고, 그것이 내 얼굴인양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그 이성의 틀에 맞아떨어지기를 요구하지 말아라. 나를 보고싶은 사람은 내가 베푸는 은혜를 보고 그 은혜를 경험할 때, 바로 그때 내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하라. 내가 불쌍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볼 때, 그 불쌍히 여김에 감동이 일어난다면, 그걸로 내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해라. 내 은혜의 사건을 보거든 그 사건 속에서 내 얼굴을 보아라. 왜, 어떻게 거울에 비친 사람의 얼굴처럼 내 얼굴을 보려고 하느냐. 내 영광은 실존 가운데서, 역사적 사건 가운데서 체험하는 것이다. 심오한 진리는 가슴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나를 경험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눈으로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러므로 나의 얼굴은 영광이라 부르고, 또 나의 나타남은 거룩함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은 깊이의 세계이다 종교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넓이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은 깊이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를 많이 읽었다고, 기독교 교리와 신학을 많이 안다고 신앙이 그만큼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이 아는 그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영역에는 넓게 많이 아는 것 보다 깊게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깊이, 인생이 깊음, 역사의 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깊음은 높음에 맞닿아 있는 깊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높음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깊음을 적시고 있습니다. 인간사에 국한하더라도, 여러 곳을 헤매어 돌아다닌다고 해서 전체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높은 산의 꼭대기로 올라감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넓이의 세계가 아니라 깊이의 세계요, 낮은 세계가 아니라 높은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산에 오를 때 꼭대기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시야가 넓어집니다. 정말로 넓은 지식을 찾고자 하시면 한 우물을 파고 끝까지 내려가십시오. 그 끝은 꼭대기에 닿아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싶으시면 자기 실존의 깊은 그 바닥으로, 이 역사의 나락으로 침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깊이의 세계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깊음 속에 그리스도께서 내재(內在)하십니다. 높음 속에 그리스도께서 초월한 모습으로 계십니다. 진실함으로 깊은 곳에서 찾아보라 다시 모세가 간구합니다. “그래도 얼굴 좀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시 분부하십니다. “얼굴을 보려고 하지 말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 호렙 산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거기서 나를 경험해라.” 오늘 우리의 신앙은 깊은 신앙인지, 얇고 넓은 신앙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를 넓음과 많음 가운데에서 찾지 말고, 진실함으로 깊은 곳에서 찾아보라고 말입니다. 혹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의 거품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그런 거품 가운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모습을 보고싶어 하시며, 그 진실 속에 임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준비를 하시는데 사람들이 묻습니다.“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예수의 대답입니다.“신랑이 있는데 어떻게 금식하겠는가?”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지금 와 계시는데, 바로 그분과 함께 살고 있는데, 지금 금식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분의 영광을 보기 원해 금식하는 당신들은 하나님을 못 만나서 금식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왜 금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실은 많음에 있지 않고, 깊음과 높음 속에 있다. 하나님의 진실은 양이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실은 많음에 있지 않고, 깊음과 높음 속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구약 시절에 직접 나타나시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하나님이 자꾸 내려와 주시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꾸 오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도 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 가지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나 스스로가 인간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세상으로 가겠다. 내 얼굴이 보고싶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라.” 하나님이 어디서 태어나십니까? 말구유간에서 태어나십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구원을 베푸십니까? 십자가 위에서 찢겨져서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어디에서 인간에게 소망을 주십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니, 그것이 인간의 소망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적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높이 계셨으나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맞은 모습으로 임재하셨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하십시오.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와 함께 참으십시오.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성도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십시오. 손님 대접하기도 힘쓰십시오.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모세가 갈구했던 하나님의 얼굴 보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의 신이며 동시에 내재하는 신이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그 속에 우리에게 주는 진리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 속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실 속에만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망 속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희망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탐욕스러운 곳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헌신하는 마음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서로를 불신하는 사회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신뢰하는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미움 속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속에만 계십니다. 거짓과 절망과 탐욕과 불신과 미움 가운데에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밤에도 계시고 낮에도 계십니다. 온통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안 계신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거짓 사회에도 계시기는 하지만, 그 곳에서는 초월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심판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진실 속에도 계시지만, 그 곳에서는 내재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함께하는 사랑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의 신이시며 동시에 내재하는 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질서가 왜곡될 때는 초월한 모습으로 계십니다. 그 가운데 계시지 않고 그 위에 계십니다. 악한 세계와 완전히 다른 분으로, 절대 타자(他者)로, 그래서 심판자로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종교학자들이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를 논의하다가 불의에 대해서는 그 가운데 계시지 않고, 그 위에 계시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 초월을 계시지 않음이라고 생각하고 신은 없다고 했습니다. 무신론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곳, 신뢰를 나누는 곳에서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학자들은 하나님은 계시다고 외칩니다. 이른바 유신론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지금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계시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담을 우리의 그릇은 아직도 불의이고 불신이고 미움이고 탐욕입니다. 이런 곳에 예수 그리스도는 계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이라고" 이 하나님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새 포도주입니다. 이 새 포도주를 어떻게 우리들의 불신이라는 낡은 가죽부대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가죽부대를 좀 바꾸어야 합니다. 불신에서 신뢰로 바꾸고,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바꾸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도약하고, 탐욕을 버리고 헌신하십시오. 그러면 새 포도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가득히 임할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의 강조점은 새 술에 있지 않습니다. 새 술은 이미 옛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성령, 부활!. 세월이 가고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새 포도주입니다. 문제는 부대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거든, 여러분의 그릇을 바꾸십시오. 여러분이 그릇을 바꾸지 않으면 나는 여러분에게 임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유대 백성들을 향한 예수의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을 베풀려고 메시아로 왔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이란 그릇에 담길 수는 없습니다. 나는 복음이라는 새로운 가죽부대에 담겨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복음으로 바꾸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고 싶거든! 나를 담고 싶거든!” 그들은 그 말을 듣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새 가죽부대는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십자가라는 새 가죽부대입니다. 그 십자가라는 부대 속에 하나님은 내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에 눈을 감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초월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십자가에 내재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계셨다고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재해 계시는 새 가죽부대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새 부대를 그 가슴속에, 그 영혼 속에 새겨야 합니다. 교회를 짓는 곳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를 다십시오. 가정에도 우리의 새로운 가죽부대로서 십자가를 갖다 놓으십시오. 새 부대 속에서 만이 참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가 생겨납니다.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으시길 바랍니다. 어느 신문의 단신 하나를 소개합니다. 대만의 어떤 청년 하나가 한 여성을 흠모해서 러브레터를 썼는데, 2년 동안 7백 통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론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이 여성은 그 많은 편지를 배달한 우편배달부하고 결혼했습니다.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종이쪽지로 사랑을 전하는 것은 너무 멀고, 그 사랑의 편지 때문에 매일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만나게 된 배달부와는 너무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종이로 전하는 마음보다 직접 눈으로 가슴으로 전하는 마음이 더 강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한테 러브레터 쓰셨습니까? 하나님이 누구하고 결혼하실 것 같습니까? 글을 많이 쓴 사람이요? 편지를 쓰고 또 쓴 사람이요? 아닙니다. 그 사랑을 직접 몸으로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는 종이에 쓴 사랑보다, 가슴과 가슴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신앙, 그렇게 만나는 깊음, 그렇게 진실된 사랑, 그렇게 뜨겁게 하나 되는 교류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과 교류 가운데에 내재한 모습으로 계십니다. 우리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불의와 불신 속에서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신년부흥사경회를 통하여 말씀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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