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적인 신앙의 삶 2001-12-13 19:58:05 2001년 1월 21일 눅 13:6-9 버림받거나 거부당하는 아픔 여러분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배신 당하거나 버림받거나 거부당하는 아픔을 경험해보셨습니까? 나를 배신하는 것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내가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하여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일의 결과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희생했는데 결과가 목적을 배신할 때 그 고통은 매우 큰 것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거부당하는 생명이 있는가 하면 노년에 자식들에게 버림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엄마가 자기를 떠날까봐 잠결에도 엄마에게서 손을 떼지 못하는 젖먹이가 있는가 하면, 남편에게나 아내에게 버림을 받을까 맘 조리는 어른들도 있습니다. 사회 생활하는 가운데서는 윗사람에게서 버림받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맘놓고 기댈 데가 없으면 불안해집니다. 그리하다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에게서 버림받거나 거부당하면, 그 삶이 엄청나게 망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자신 없어 의기소침해 하거나 아니면 겉으로 괜히 강한 척하며 억지를 부리게 되기도 합니다. 한 번 버림받거나 거부당한 아픔도 오래 그 사람의 삶을 힘들게 할 수 있다면,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은 경우에 그 삶을 제대로 유지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남에게 버림받거나 거부당하지 않도록 애쓰기도 해야 하겠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을 버리거나 거부하여 다시 싸매기 힘든 아픔을 남기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할 뿐 아니라 그런 아픔 가운데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따뜻이 받아들이고 감싸는 일에 더욱더 힘써야 하겠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의 이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나무치고는 참 못 생긴 나무입니다. 그 나무잎도 그저 보통 가랑잎같이 생겼고, 또 곧게 자라서 뭐 재목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나무도 아닙니다. 그저 비틀비틀하면서 옆으로 퍼져서 그 재목으로도 쓸 수가 없는 나무입니다. 그런가 하면 관상나무도 아닙니다. 벚꽃은 활짝 피는 멋이 있는데 장미꽃은 참으로 우아한데 무화과 나무는 그것도 없는 참 못 생긴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오직 열매 때문입니다. 열매를 목적으로 심는 나무입니다. 오직 무화과 나무의 목적은 그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는 많이 열립니다. 그 뿐만 아니라 무화과 열매는 다 익기 전에도 정말 배가 고플 때에는 따서 먹고 시장기를 끌 수가 있는 그런 열매입니다.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길거리에 많이 심어놓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이제 배고픈 사람은 좀 따서 먹고 정말 급한 배고픈 사정을 면할 수도 있는 그런 나무입니다. 목적이 그 가치를 결정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 말씀대로 보면 이 무화과 나무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심어 놓은 것입니다. 열매가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해서 무화과를 심었는데 그 열매가 없다면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은 좋은 목적을 가진 것은 좋은 것이요, 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그 어느 것이든지 다 귀한 것이 됩니다. 그 목적이 그 가치를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창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에 마른 풀도 발에 걷어차이는 돌 하나도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지 다 나름의 목적과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1장에서 말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소중한 간증을 합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자기를 위해서 자기로 인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감격하고 "맞어, 맞어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확실합니까?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 해 보셨습니까? 거기에 삶의 목적이 있는 것이고 내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건으로 보아도 우연한 사건은 없습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다 신중한 의미가 있어요. 심지어는 인간의 실수까지도. 그 속에 의미가 있구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되는 일입니다. 사고든 질병이든 엄청나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도 하나님께는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있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요. 없다고 해서 "당장 찍어버리라"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3년을 기다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고마운 말씀입니다. 열매 없는 것을 알고도 1년 2년 3년을 기다렸어요. 그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기다림, 하나님의 인내, 그 속에 긍휼과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기다림이란 것은 곧 인격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돌아오기를 열매맺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아름다운 관계가 있어요. 계속해서 김을 매주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가꾸어 주면서 기다립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비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릴 때 거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련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주의 종들을 통해서 계속 일깨우시면서 많은 수고를 하면서 기다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3년이 지난 다음에 주인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나무를 찍어버리라"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았어요. 그러나 끝까지 참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가서는 심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고 인내의 한계를 말씀합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예수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타국으로 갔고 그리고 종을 보내서 세를 받으려고 했는데 안주고 때려 죽였다. 또 다른 종을 보냈는데 말을 안 들었고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냈지만, "상속자니 이 사람만 죽이면 저 땅이 우리 것 될 것이다"하고 죽였습니다. 지금 이제 주인이 와서 어떻게 하겠느뇨?" 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인내의 한계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고 그 속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 속에 무한한 주님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거기에 심판이라고 하는 무서운 선언이 그 속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자, 이 열매 없는 이 무화과나무 찍어버려!" 했더니 과원지기가 대신 나타납니다. 이 나무는 말을 못합니다.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과원지기가 하는 말이 여기서 주도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 스티븐 코비는 그가 쓴 책 속에서 일곱 가지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말하는데 그 중에 첫째가 주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책임진다" 그 말입니다. 그 책에서 강조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한 일이에요. 그럴 때에 주도성이 살아납니다. 만일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저 사람이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내 존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뭐지요? 난 아무 것도 아니요. 어떤 일이든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것이 주도적 인격입니다. 내가 책임질 때 그만큼 내 존재가 커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존재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핑계를 많이 하는 사람, 특별히 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은 존재가 아주 형편이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부부싸움을 하다가 너무 화를 내니까 아내가 왜 당신은 이렇게 계속 화를 내느냐고 합니다. 그때 남편이 하는 대답이 뭔 줄 아세요? "나는 본래 그렇지 않았는데 당신하고 살면서 이렇게 됐다." 참으로 못난 남자입니다. 자기가 못났지 누구 책임입니까? 우리 인간이 바로 이렇게 될 때 인간 가치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순간 내 존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망할 것 없고 환경 탓 할 것도 없어요. 누구 누구가 잘못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내 책임 내가 지는 겁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의 존재가 살아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책임을 내가 질 뿐만 아니라 남의 책임까지도 내가 질 수 있을 때에 그 만큼 나의 인생의 영역이 커지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언론가 중에 한 사람인 월터 크론카이트라고 하는 분에게 누가 질문하기를 "당신의 성공 비결이 뭡니까?" 물었더니 한마디 대답하기를 "방송이 나를 위해 있으니까요" 라고 말했어요. 그 한 마디 속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직장이 있는 것이지 직장을 위해 내가 있는 게 아니다."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어디 가서 일을 하던지 "이것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생각할 때도 가정을 위해 지금 내가 머슴살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가정이 있다는 그런 마음으로 가정을 대하면 가정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왜 이래? 무슨 교회가 이런가? 하면 그순간 영암교회는 주인이 내가 안되고 다른 사람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이것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므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도 내가 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존재의 영역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은 무화과나무 과원지기가 책임을 지면서 하는 말 속에 중요한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열매가 없습니다. 3년 동안 없었어요. 그러나 주인인 과원지기는 생각합니다. 이 속에 잠재적 가능성이 있고 잠재적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장애와 병은 다른 겁니다. 병은 지금 아프고 괴롭지마는 이건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이 있지요. 그러나 장애라는 것은 이젠 멎은 거예요. 그래서 장애자가 불쌍한 거예요. 장애는 끝난 거예요. 이제 그게 낫는 게 아니에요. 없던 팔이 생기는 거 아니잖아요. 그게 장애입니다. 그러나 병은 지금은 괴롭지만 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과원지기는 이 무화과를 보면서 이것을 생리적으로 보지 않고 병리적으로 보았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여러분 혹 부부싸움을 할 때요 두 사람의 말 속에 "항상"이라는 말을 빼야 가정이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밤낮 그 모양이야?" "왜 항상 늦게 돌아오느냐" 이럴 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하나 더 떠서 "당신의 아버지도 그랬다는데 당신도 그래?" 이렇게 아예 유전인자 문제로 문제를 삼으면 이건 아예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쪽에서 막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있는 것도 처음 있는 것처럼, 볼 줄 아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가질 때, 믿어줄 때 그 속에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걸 볼 줄 아는 믿음,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이 과원지기는 열매 없는 이유에 대해서 그것을 함께 할려고 했어요.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도 있다. " "책임이 저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도 있습니다" 라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얼마 전 타이타닉의 주제가를 부른 셀린 디온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세계를 매료시켰고 발매되는 음반마다 수백만 장이 팔리는 세계 최고의 가수가 갑작스럽게 왜 은퇴했습니까? 그녀는 12살 때 자기가 부른 노래 테이프를 들고 후원자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실력은 인정했지만 아무도 선뜻 그의 후원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안젤린이라는 한 청년이 실망한 그녀에게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재산을 처분해 그녀의 음반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셀린의 일이라면 무조건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그녀를 돕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 세계적 여가수가 됩니다. 그런 그녀가 은퇴하는데, 은퇴 회견을 하면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 남편이 지금 후두암으로 투병중입니다. 남편은 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많은 빚을 진 남편 곁에서 그에게 따뜻한 손길을 주고 싶습니다. 저의 성공보다 남편과의 사랑이 저에게는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헌신을 모르면, 책임을 갖지 못하면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시민의식 실종·행정 복지부동· 지난 7일 이후 10일 동안 이어진 20년만의 폭설과 15년만의 혹한등은 각종 기상 기록과 함께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리트머스 시험지’역할을 했다는 자성이 일고 있습니다. 불과 며칠간의 폭설과 혹한에 전국 공항 마비, 고속도로 불통, 수돗물·가스공급 중단, 수천억원대의 농어민 피해 등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물론 불가항력적인 천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허술한 시민의식 부재, 복지부동의 행정 등에서 오는 인재의 성격도 다분하다는 지적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눈이 오면 너도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의 집앞은 물론 이웃집 앞까지 말끔하게 쓸어주던 미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십여일 전국의 큰 도로에서 골목길까지 대부분 길은 아무도 눈을 쓸지 않아 두꺼운 얼음에 덮여 있었습니다. 공항과 터미널에서 발이 묶인 시민들은 하늘이 두쪽 나도 무조건 비행기를 타야한다며 막무가내식 불호령을 하는가 하면 항공사 직원과 멱살잡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이 7일부터 36시간동안이나 불통됐던 원인은 폭설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당국의 통제를 따르지 않은 시민들의‘생떼"도 한 몫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교수는“이번 날씨 소동은 우리사회의 공동체 의식과 시민의식이 얼마나 약화됐는지 여실히 드러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을 때 그 사회나 공동체는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습니다. 바로 이 순간 과원지기가 함께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그 뿐 아니라 책임을 지고 다시 1년 동안 수고하겠다는 겁니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 찍으세요. 한 번 더 기회를 주세요. 종말론적 기회를 주세요" 이렇게 요청합니다. 이것은 무화과나무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이 과원지기에게 기회를 준겁니다. "네가 다시 한 번 해봐라."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부자만을 연구한 사람이 있는데 백만장자들이 백만장자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은 심층분석 한 결과 여덟 가지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은 결코 교육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고 운도 아니에요. 백만장자가 되는 길은 성실함과 건전함과 원만한 가정과 종교적 신앙과 우정과 스포츠맨쉽, 낙천성, 그리고 자기 관리 능력이 있고 나아가서 남의 책임을 내가 지는 성격을 가졌어요. 이 사람이 백만장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뭘 잘못 했다고 다 남에게 떠맡기고 이리저리 변명하는 시시한 인간은 성공할 수가 없없습니다. 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같이 허물이 많고 부족하지마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고 가능성이 있어요. 십자가의 희생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리를 믿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도적 신앙의 본질이란 바로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를 위해서 대신 책임을 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주도적 신앙이란 생산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책임지는 그 누군가가 있어서 이 나무는 다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을 향한 제언 새해의 달력이 숨가쁘게 넘어간다.1월도 어느덧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새해들어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한 결심은 잘 이행되고 있을까요? 우리들의 새로운 다짐을 위해 몇가지 자문을 해봅니다. 다음은 새로운 다짐을 약속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안하는 목록입니다. 성공을 향한 10 가지 제안 1.시간을 몹시 아껴서 쓰겠다.2 즐겁고 명랑하게 일하겠다.3.단순하게 살겠다.4.남을 되도록 친절하게 대하겠다.5.발뺌하지 않고 물러앉지 않고 책임지는 각오로 살겠다.6.과욕을 품지 않겠다.너무 짊어지려 하지 않고 너무 가지려 하지 않고 너무 나를 드러내려 하지 않겠다.7.끝까지 참아 보겠다.8.앞서 가는 자가 되겠다.먼저 눈을 밟아 길을 만들 듯이 선두주자의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겠다.9.꾸준히 착실하게 걸어가리라.10.내일을 하나님의 품에 맡기고 살겠다. ◇좀 더 구체적인 10 가지 결심 1.한눈팔지 않겠다.2.흐지부지 세월 보내지 않겠다.3.매일 한 시간씩 아이들과 함께 지내겠다.4.담배를 끊겠다.5.출장 중이 아닌한 저녁식사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먹겠다.6.거짓말을 안하겠다.해를 끼치지 않는 말이라도 과장 거짓은 내 입에서 추방하겠다.7.어떤 경우에라도 한숨짓지 않겠다.8.새해 365일 동안 부부싸움을 포함, 한번도 싸우지 않겠다.9.양심을 속이는 일은 절대 안하겠다.10.남을 깎아내리는 말, 뒷공론,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말은 안하겠다. ◇행복으로 들어가는 10 대문 첫째 문;핑계의 버릇을 거두자.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행동으로써 자기를 증명하라.시간엄수.약속이행.핑계 변명말기. 둘째 문;비교하며 살지 말자.너는 너,나는 나.내 길에 긍지를 가지라. 셋째 문; 뒤에서 밀어 주고 박수로 격려해 주는 사람이 되자. 넷째 문;돈에 붙잡히지 말자.돈에 짓눌리고 돈에 쫓기면 반드시 불행. 다섯째 문;눈을 들어 산을 보자.이것은 시편의 교훈.시선은 높고 시야는 넓으며 사는 목적은 고상해야 한다. 여섯째 문;하나도 겸손,둘도 겸손.겸손은 자기를 정직하게 보는 것.겸손은 건축의 기초.믿음이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겸손.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일곱째 문;순리대로 살겠다.억지,조작,편법,강제,밀어붙이기,오기 살리기,체면 세우기 등은 깨지기 전주곡. 여덟째 문;자폐증 환자 되지 말자.표현하지 않으면 인간 관계 더 꼬인다.풀지 않으면 속병이 된다. 아홉째 문;절대 포기하지 말라.희망은 낙관적인 인생관, 진실의 최후 승리를 믿는 것. 열번째 문;하나님을 제쳐놓지 말라.하나님은 그대를 도우시는 자,쉼터,평화의 항구,의욕의 샘,어둠 속의 등대이다. 각각의 제안들 가운데 책임지는 각오로 살겠다는 항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도적인 신앙인의 삶은 책임을 기꺼이 지는 자세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교회 출신 한윤천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시카고 에베그린 교회 주보에 실린 신앙 간증을 양운기 집사님께서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보낸 글을 소개합니다. 산 길 "깊은 안개 속에 있는 산길을 걸어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네. 돌 뿌리에 걸려 넘어져서 아프다고, 원망하지 말세. 우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걸을 수 있기 때문에. 앞이 조금 잘 보인다 하여서, 우리 서둘러 하지 말세. 조금 빨리 오르려다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사람도 많다네. 앞이 너무 안보인다 하여, 우리 안타까워 하지 말세. 대신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음에 조용히 감사드리세. 조그마한 봉우리에 잠시 올랐다고 하여, 우리 자랑하지 말세. 대신 힘들어 지쳐있는 친구들에게 봉우리 위에서 맛보았던 상케한 공기로 우리 희망을 주세나. 이제 우리를 아파하게 했던 돌뿌리들, 절망에 빠지게 했던 짙은 안개와 협곡, 그리고 우리에게 잔잔한 기쁨을 주었던 산들 바람들...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우리의 인생이기에 우리 가슴 속에 거르지 않고 받아들여, 아름다운 화음의 숨결체인 휘파람으로 노래하세. 비록 우리네 앞길이 험난한 바윗길로 가득차 있다 하여도 더 멋진 휘파람 소리가 우리의 가슴속에서 나올 줄 믿기에 오늘도 우리는 이 산길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걷는다네..." 때로는 가슴 벅찬 환희의 순간들, 그리고 숨쉬기 조차 힘이든 아픔의 순간들.... 힘이 들때는 주님께 많이 원망도 했지만, 즐거운 것만 나의 삶의 책에 보관하고 아픈 일은 찢어 없애 버리는 어리석은 일은 하고 싶지않다. 이 모든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께서 베푸신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의 약하고 어리석은 점을 아시면서도, 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주님께 오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네. 그리고 이 고백을 허락하시면서 흐뭇하게 웃으실 주님께 또 하나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자신의 삶을 한껏 꽃피우기 위해 끊임없이 힘쓸 뿐만 아니라 남들도 활짝 피어나게 하기 위해서 함께 협력하며 함께 책임을 지는 주도적인 신앙인의 삶을 위해 애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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