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청중분석
2024-06-18 07:34:34

항상 청중을 분석하라

복음은 사람들에게 들려질 내용이다. 그냥 공중에 떠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구원의 소식도 의미가 없다. 그러려면 아무리 훌륭한 복음의 내용이라도 듣는 이에게 맞추어 말해져야 한다. 청중은 관심이 있어야만 듣는다. 그러므로 청중의 관심을 항상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듣는 이의 입장을 존중해 주신다. 그래서 자신을 말씀으로 한정시키셨다. 커뮤니케이션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아예 사람이 되어 땅에 오셨다. 하늘에서 모든 권세와 함께 웅장한 모습으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짐을 함께 지며 고통 가운데서도 하늘 나라를 가르쳤다.

집행을 당하려는 사형수에게 사면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소식 전하는 사람이 평소에 보기도 싫은 사람이라고 하자. 놀리려 왔다고 듣지도 않으려 할 것이다. 체념하며 남은 시간을 최대한 재미있게 보내려고 사람도 만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비슷한 일이 복음 전파자에게 일어난다. 청중들이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놀라운 복음도 의미가 없게 된다. 무슨 수를 내서라도 청중이 듣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작성하기 전부터 청중을 생각해야 한다. 잘못하면 하나님의 엄청난 복음이 뻔한 소리나 싸구려 은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신학자들은 설교자의 역할이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것으로 설명한다. 바벨론과 가나안으로 상징된다. 바벨론은 보통사람들이 사는 현 세상이요 죄악의 도시이다. 반면에 가나안은 택한 백성들의 나라요 모든 신자들이 긍극적으로 가야할 곳이다. 두 지역은 물론 아주 다른 입장에 처해 있다.

바벨론에 그냥 머물어서는 심판을 면치 못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바벨론을 좋아해 영원히 머물고 싶어한다. 또한 가나안의 언어도 풍습도 모르고 좋은 점도 물론 모른다. 그래서 가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교자는 사람들을 가나안 복된 곳을 잘 알고 그리로 이끌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두 세계

세상 사람들은 죄악과 무의미 속에 허덕인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해 주고 이끌어주는 게 목회자의 임무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언어를 이해 못한다. 설교자가 하늘나라 방언으로만 말한다면 복음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는 세상나라에서 나온 사람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세상사람들의 사고에 젖었었고 그 언어를 쓰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 하늘나라에 오래 속하다보니 그 사람들의 생각과 말을 많이 잊은 상태이다. 초년병 목사라 도 이미 세상 사람들이 통상 행하는 일들을 많이 버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칫 잘못하면 완전히 세상나라와 이반된 상태로 하늘나라 말만 하며 살게 될 것이다. 교회 안 사람들이라고 하늘나라에 다 속한 것도 아니다. 대부분 양쪽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는 현상이다. 세상 사고에 아직도 깊이 젖어 있는 상태이다. 이 사람들도 역시 목사의 도움이 요구된다.

나쁜 것은 늘 상 교회에서 어려서부터 들어온 언어와 말투를 사용해 설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단어가 설교에는 많다. 또한 그중에 많은 것은 그냥 상투적으로 사용될 뿐 분명한 의미도 없다. 이런 언어들은 하늘나라의 것이 아닌 것도 많다. 그렇게 생각될 뿐이다.

흔한 불평을 한 신도를 동해 들어보자. “그 목사님 말씀은 이해가 않되. 말투부터 너무 딱딱하고 지루해. 나하고는 상관없는 몇 천 년 전 사람들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 그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네가 은혜를 못 받아서 그래. 기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들으려고 최선을 다 하라구.”

“최선을 다해야 들을 수 있는 것”이 좋은 설교일까? 세상에는 신경을 안써도 잘 들리는 게 너무도 많다. 편안히 앉아 재미있게 들을 게 많다. 그런데 누가 최선을 다해 들으려 할까? 그런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의 백성이리라. 하지만 설교는 일차적으로 바벨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모델은 물론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하늘에서 하늘나라 옷을 입고 거기 수준으로 살면서 거기 말로 아무리 외쳐 봐야 땅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땅에 내려와 거기 사람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말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설명해야 한다.

전도학에서 첫 번 째로 배우는 게 무엇인가? 교회 사람들 쓰는 말로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 “할렐루야 아멘”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은혜 받았습니다.” 무슨 이해를 줄 것인가. 한국말이지만 이질감을 느낀다. 자기와는 다른 외국인이요 이상한 사람으로 보게 마련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상한 말투를 사용한다면 이질잠은 더욱 커진다. 쉭쉭하는 소리를 내면서 말한다던지, 설교쪼나 기도투로 마구 말하고, 이상한 광신도 같은 표정과 제스추어를 쓰는 경우이다. 옷차림도 신경을 써야 한다. 외형적인 다름도 거부감을 일으키는 큰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본받아야 한다. 청중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들의 생각과 고민, 그들이 현재 처한 입장을 늘 살피고 그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들의 언어와 논리를 자꾸 접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의 세계가 청중의 세계를 이해 못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어야 한다.

청중 분석의 원리

성육신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라.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말씀이 확실하게 살아 있다. 그 말씀을 육신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자신이 육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사라지고 그냥 육신으로 변해 버린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성육신은 사라지고 구원도 없어진다.

신학교 시절이었다. 폴 틸리히의 신학에서 학생들을 매료시켰던 기막힌 그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것은 연계의 방법(method of correlation)이었다. 가나안과 바벨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와 땅 나라의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 출발점은 언제나 인간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는 철학에서 시작해서 신학으로 마치려고 하였다. 인간 속에서 문제를 찾는다. 그래서는 성경에서 그 대답을 준다. 얼핏 보면 너무도 타당한 말씀이지만 함정이 숨어있다. 인간이 자기 문제를 잘 볼 수 있다는 게 착각인 것이다. 세상 철학이 인간의 영적 모습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을까?

한센 병자가 자기 아픔을 알 수 없다. 죄인도 자기 죄를 볼 수 없다. 하나님 도움 없이 인간이 영적인 자기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인간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도 닦으며 “내가 누구인가” 아무리 물어보았자 바른 대답이 나올 리 없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가. 대답한다. “돈이 없어서 그래요.” “병만 나으면 만사 해결입니다.” “남편만 돌아오면 됩니다.”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면 됩니다.” 과연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가? 차칫 잘못하면 여기에다 설교의 초점을 맞추고 끝낼 수 있다.

차원 높게 철학으로 하면 인간 문제를 바로 볼 수 있을까?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은 한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다. 한계 속에서 이왕 망해갈 바에는 당당하게 망해가라는 것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의 가르침이다. 한계가 무엇이고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결할지도 정확하지 않다.

인간문제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잘못된 분석을 준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거기서 인간의 문제를 분석해야 한다. 성경은 인간의 문제를 명확하게 지적한다. 하나님에 대한 배신, 곧 죄가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과 단절된 인간이 무엇인들 제대로 될 것인가!

신앙 없는 사람은 절대로 인간의 문제를 정확히 볼 수 없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바른 철학을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이해일 뿐이다. 그저 돈이나 주고 병이나 고쳐지면 해결되는 게 인간의 문제인가? 죄는 그것보다 훨씬 뿌리 깊고 훨씬 더 인간을 무섭게 파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중을 분석하는 원리도 분명해 진다. 그냥 인간적인 어떤 원리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율법을 통해 말해준다. 그리고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복음으로 비추어 준다. 마귀처럼 멸망해 갈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로 일어난다.

성육신을 복음적 의미에서 이해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청중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과 같아지는 게 목적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성경은 명확히 설명한다. 인간 문제를 성경만큼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다룬 자료는 없다. 인간의 문제는 죄요 생명의 결여요 영원한 지옥이다.

성경에 의존한 청중분석: 두 가지 지식

인간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 분석해 보자. 칼빈의 설명은 가장 분명한 이해를 준다. <기독교강요> 서두에 말한다.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 내는가를 알아내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이 두 지식은 절대로 한 쪽만으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인간은 자신을 볼 수 없고 자신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 도움이 없이 어떻게 인간이 자신을 볼 수 있겠는가. 남들하고 비교해서 자신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항상 자기의 이해는 상대적이다. 기준이 정확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교만하고 동시에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세상 수준에서 월등해지려고 이성을 잃고 달려든다.

하나님의 밝은 빛 아래 서야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정확히 보게 된다. 버림받은 죄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과 맞닥뜨릴 때 땅에 엎드려진다. 떨면서 겨우 몇 마디 할뿐이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자신을 바로 본 것이다.

우리 존재 자체가 본래 하나님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보는 자신은 최초의 범죄시부터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영광의 의복을 빼앗긴 뒤에 벌거벗은 수치는 하나님을 찾게 한다.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부패와 타락을 깨닫고 참된 광명, 덕, 의와 순결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보고 그의 빛으로 자신을 보도록 누군가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것도 그 이유이다. 이제 설교자는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재차 성육신하도록 일해야 한다. 안그러면 죄인이 그리스도도 하나님도 볼 수 없다.

설교자는 사람들을 잘 살펴야 그들 속에 성육신할 수 있다. 물론 재산이나 건강이 그들의 일차적 욕구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죄다. 하지만 그들의 일차적인 고통을 외면하면서 죄만 지적 할 수는 없다. 그들의 입장에서 출발해 그들의 영적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말씀 전하시는 방법을 보라. 먼저 청중의 관심을 끈다. 즉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인에게 물을 청한다. 그러면서 마시는 물에서 시작하여 생명수로 발전해 나간다. 그리고는 여인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만든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인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를 이어준다.

여인의 입장을 이해해서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일으켜 하늘을 바라보게 만든다. 설교자도 같은 일을 한다. 청중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거기 머물어 그들과 하나가 되고 마는 게 아니다. 그들이 하늘로 인도되게 해야 한다.

성육신의 방법은 설교자에게 필수적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다. 설교자는 땅에서 하늘로 올리우고 다시 땅으로 내리운다. 그래서 청중들을 하늘로 인도해 올리는 사명을 가진다. 그러려면 반드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들의 자리에 와서 그들의 언어와 사고로 시작해야 한다.

상담이나 심방시 청중분석의 적용

청중과 같아지고 그들과 공통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그들의 삶에 언제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관심은 반드시 복음적이어야 한다. 청중을 있는 그대로 받으라. 그러면서도 그들의 입장은 반드시 하늘의 눈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율법과 복음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청중을 분석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몇 백 명 때로는 몇 천 명되는 사람들을 잘 안다는 게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 청년들, 중년 남자들, 직장 여성, 가정주부, 가난한 사람 풍족한 사람, 자녀걱정하는 부모, 결혼 못하고 있는 나이 많은 처녀들, 그들의 아픔을 속속들이 나누는가?

생각해 보라. 자신이 설교를 듣고 있는 경우를.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흥미도 재미도 없는 뻔한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자주 하는 경험이다. 청중은 설교가 자기와 관계없다는 생각이 드는 즉시 청취를 중단한다. 비록 얼굴과 눈은 강대상을 향해도 마음은 천리만리 다른 곳을 헤맨다.

청중 분석을 위해 여러 접촉의 형태를 통해 정보 수집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들의 말하는 것과 사는 것 느끼는 것 관심사를 살펴본다. 각 부서에서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간섭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의 관심이 어디 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느껴보려는 것이다.

상담이나 심방도 청중분석의 좋은 계기이다. 그냥 교과서적인 태도를 대하지 말라. 정말로 상대방 입장이 되기 위해 진지하게 그들의 아픔을 들어보라. 그리고 그 말들을 자신의 삶에도 적용시켜보라. 그것을 내 문제처럼 생각하며 씨름해 보라.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라.

간접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교사나 직원들 구역장이나 선교회의 임원들을 통해 또는 보통 신자들을 통해 공식적, 비공식적 상황에서 얻어낼 수 있다. 저명한 설교자 필립스 부룩스는 사람들로부터 설교의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고 분석했다.

그들이 염려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청중을 한 집단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그들의 유사점과 상이점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하겠다. 청중이 어떤 유형인지 또는 전체적으로 어떤 평균치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가능하면 그들 전체에 해당되는 요구사항을 잡아내야 한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설교자가 스위스에서 설교 한 적이 있었다. 거기 있었던 유학생의 말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돈이 너무 많아 문제이다. 그러므로 돈 버는 설교는 관심 밖이다. 그런데 그분은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고 계속 설교했다. 자기 교회에 백만장자가 몇 명이라고 자랑했다.”

전혀 청중의 관심사와는 다른 설교였다.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어떻게 돈을 잘 쓸 수 있는지 설명해야 했다. 설교하기 전에 미리 물어볼 수도 있었다. 비슷한 예로 청년들에게 늙고 병듦을 말해 보았자 아무 반응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인생의 미래를 말해야 할 것이다.

설교전과 도중 그리고 설교후의 분석

어떤 말씀을 준비할 때 전해지는 대상을 분석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자기 교회에서 아주 성공한 설교를 그대로 다른 교회에서 할 때 전혀 반응이 없는 경우가 많다. 다른 대상에게 같은 설교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청중을 분석한 뒤에는 전달 방법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대개 설교자들은 청중이 자기와 같은 환경에 처해 있으며 자기 설교에 대해서 자신과 비슷하게 생각하리라 가정한다.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을 미리 상상해야 한다. 자기 설교에 지지자, 중립자, 반대자가 반드시 있음을 예상하고 설교의 내용을 작성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늘 대하는 청중이 아니라면 회중에 관해 물어 보아야 한다. 연령, 거주장소, 직업, 학력, 성향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교회일수록 노인이 많다. 담임목사가 젊으면 대체로 젊은이들이 많다. 지역에 따라 교인들의 사고방식도 아주 차이가 있다.

월터 보위의 말이다. “설교자는 교회에 들어가 한 곳에 무릎을 꿇고 거기 앉을 사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신자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진 사업가가 앉을 것이다. 그 옆 자리에는 가정불화 속에 상처를 안고 있는 부인이 앉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 있는 그들은 서로 다른 인격과 서른 다른 기쁨과 슬픔, 서로 다른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 주일날 들려질 설교가 그들에게 무슨 의미를 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면서 설교를 작성하라. 물론 복음의 진리이다. 그것을 그들의 문제에 맞추어야 한다.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청중분석은 계속 되어야 한다. 자리에 앉은 태도, 얼굴의 표정, 웃음, 나타나는 반응 등을 느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는 언제나 분위기를 읽는다. 원고에만 신경을 쓴다면 초보다. 설교자는 분위기를 이끌어 나간다. 거기 맞추어 말의 내용도 적용시켜 나간다.

청중의 태도는 설교자의 단어 선택과 언어 사용, 내용의 조직, 외모, 제스츄어, 목소리의 특징 등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설교가 끝나기까지 처음 태도가 그대로 유지될까? 그렇지 않다. 무디를 처음 본 사람은 그의 외모에 감동을 받지 못한다. 설교가 진행되면서 마음이 녹아 내렸다고 한다.

바우만은 설교자의 능력이 두 가지에 달려있다고 한다. 청중의 암시를 즉각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하나요, 거기에 반응해서 설득력을 증가시키는 능력이다. 이렇게 된다면 청중의 마음을 잡고 그들을 이끄는데 문제가 없다. 여기서 그치면 안 된다. 하늘의 말씀을 넣어주어야 한다.

청중 분석하는 능력은 훈련에 의해 증가된다. 이 점은 여러 연구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것은 설교가 단지 원고 내용의 전달이 아님을 보여준다. 설교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신비한 사건이다. 설교자는 청중 전체에게 설교하는 게 아니라 인격체인 개개인에게 한다.

설교가 마쳐진 다음에 설교자는 청중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 읽을 수 있다. 문에서 만나 악수하는 그 시간에 또 한 번 인격적인 교류가 일어날 수 있다. 민감한 설교자는 그들에게서 한번 더 도전을 받는다. 반응을 두고 두고 느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청중 분석을 생각해 보았다. 설교자는 청중을 교묘히 다루는 사람도 원고만 전달하는 사람도 아니다. 성육신적 설교는 그런 게 아니다. 청중을 느낀다. 설교의 역동적 순간에 청중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에 맞추어 복음을 전달한다. 접촉점을 찾아 생명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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