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운전하며 목회 “무당 승객도 전도했어요 / 베이비박스에 아기 놓고 간 엄마의 편지 / 2015-05-08 11:26:33 ![]() 택시 운전하며 목회 “무당 승객도 전도했어요” 인천 효성동열방교회 김정우 목사 기증받은 소책자로 복음 전해 … “택시 전도사 계속 나오길” 택시 운전하며 목회 “무당 승객도 전도했어요”… 인천 효성동열방교회 김정우 목사 기사의 사진인천 효성동열방교회 김정우 목사가 최근 손님에게 나눠주는 전도 소책자를 들고 택시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인천=허란 인턴기자 형편이 어려워 택시를 운전하는 목회자는 많지만 대부분 쉬쉬한다.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천 효성동열방교회 김정우(62) 목사는 택시를 운전하면서 목회자라고 밝힐 뿐만 아니라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 소책자도 나눠준다. 택시운전도 목회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도 처음에는 교회 월세와 공과금이라도 벌어볼까 하고 지난해 1월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교회를 개척한 지 20개월이 됐지만 성도는 한 명도 없었다. 월세는 2개월째 밀렸고, 건물 주인은 당장 건물을 비우라고 성화였다. 아내가 가정 도우미라도 하겠다고 나섰다. 김 목사는 아내를 만류하고 대신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부끄럽기도 했다. 그 즈음 한 목회자 모임에서 ‘국토순례전도단’의 김완섭 목사를 만났다. 김완섭 목사는 매달 사비 400만원을 들여 전도 소책자 2만여권을 찍어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 김정우 목사가 영업용 택시를 운전하고 있다고 하자 김완섭 목사는 전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이 소책자 1500권을 매달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발상의 전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도도 목회인데, 전도하려면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잖아요. 택시 운전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나 싶었죠.” 김정우 목사는 이때부터 택시 손님들에 대한 전도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김 목사는 단순히 소책자만 건네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복음을 전한다. 운행 거리가 15분 이상일 것 같으면 재미있고 메시지가 확실한 이야기들을 꺼낸다. ‘농부와 병아리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병아리를 아주 예뻐하는 농부가 있다. 병아리가 아프자 한 지인이 당신 아들의 심장에서 피를 조금 뽑아 뿌리면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농부는 당연히 미쳤다고 그를 나무란다. 김 목사는 이 이야기 끝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소책자를 건넨다. 이렇게 전하는 소책자가 많을 땐 하루에 100여권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작두를 탄다는 무당이었다. 김포공항에서 택시를 탄 무당은 제주에서 막 굿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김 목사가 복음을 전하자 무당은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김 목사가 “무당이니까 당신도 죽은 사람들을 많이 보지 않았느냐”며 “기독교인의 죽은 모습은 평안하지 않더냐”고 했더니 무당도 이를 인정하며 김 목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이 무당은 택시에서 내릴 때 소책자도 받아 갔다. 택시 운전기사를 전도하러 다닌다는 한 집사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이번에는 주객이 전도됐다”면서 내릴 때 택시비 외에 헌금이라며 10만원을 더 주었다. 김 목사는 “택시를 운전한다고 하면 다들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본다”면서 “하지만 택시운전도 목회라고 생각하니까 목회자들이 큰 예배당 욕심내듯 개인택시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며 웃었다. 그는 “형편이 어려운 목회자 2000여명이 이미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면서 “그냥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까지 전하는 ‘택시전도사’ 2호, 3호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지난달 더 좋은 조건에 더 좋은 택시회사로 스카우트됐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불법 운전을 할 수는 없지 않으냐”면서 “덕분에 업계에서 모범운전사로 소문이 난 모양”이라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꼭 찾으러 오겠습니다” 베이비박스에 아기 놓고 간 엄마의 편지 한 통 ![]() ▲이종락 목사와 정병옥 사모가 아이들과 함께 베이비박스 앞에 서 있다. 국민일보DB "어미 젖 한번 물(리)지 못하고 아이와 하룻밤도 맘 편히 따스하게 자지 못한 이 엄마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 하늘이 잘 부탁합니다. 죄송합니다. 꼭 찾으러 오겠습니다." 이것은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놓고 가며 엄마가 남긴 한 통의 편지입니다. 하늘이 엄마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참담한 심경을 한 통의 편지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스스로 다짐하듯 “꼭 찾으러 오겠다”고 되풀이하는 하늘이 엄마의 말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연합뉴스 제공 편지는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서울 난곡동 주사랑공동체교회 정영란 전도사에 의해 공개됐습니다. 하늘이는 지난 2월 태어난 지 4일 만에 베이비박스에 맡겨졌습니다. 아이 옷을 다 입혀 포대기로 소중히 감싸 안고 온 하늘이 엄마는 베이비박스에 놓인 아이를 받으러 나온 정 전도사의 손을 붙잡고 한참 동안 울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하늘이 아빠는 임신 7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하늘이 엄마는 하루 아침에 '미혼모'가 됐습니다. 하늘이 엄마는 몸이 편찮으신 부모님께 차마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어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맡기게 됐습니다. 그러나 5년 안에 꼭 아이를 찾으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하늘이 엄마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영란 전도사는 "이곳에 아이를 몰래 놓고 가는 사람보다는 나를 만나 직접 맡기는 사람이 훨씬 많다"며 "이들은 키울 의지가 없어 아이를 몰래 낳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지는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맡기러 오는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주사랑공동체교회는 2009년 12월 전국에서 최초로 베이비박스를 설치했습니다. 베이비박스는 영유아들이 길거리에 유기돼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발생하자 이를 방지하고자 아예 교회 벽을 허물고 박스를 설치한 것입니다. 현재 이곳 외에 경기 군포시 새가나안교회에 베이비박스가 하나 더 있습니다. 베이비박스를 만든 이 교회 이종락 목사는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날마다 아기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부모들이 아이를 못 키운다면 국가가 대신해 아이를 키우고 공부시키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유기도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 주일에는 학원 가지 맙시다’ 쉼이있는교육 캠페인 동참 원천침례교회 김요셉 목사 ![]() “안식을 통해 자녀들이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4일 경기도 수원 영통구 월드컵로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 만난 김요셉(54·수원 원천침례교회) 목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학교 교목이기도 한 김 목사는 좋은교사운동과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가 국민일보와 함께 진행 중인 ‘쉼이 있는 교육’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캠페인은 ‘학생들이 주일에는 학원에 가지 않고 안식할 수 있도록 하며, 다음세대가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고 교회와 가정이 영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김 목사는 “일주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정해 놓고, 인간적인 욕심과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는 성향을 모두 내려놓은 채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며 “이때에 온전한 회복이 이뤄지고, 질서가 잡히면서 학업과 일에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성세대인 크리스천들은 요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세속화됐다고 평가하는데 다음세대가 그렇게 된 원인은 어른들에게 있다”며 “자녀들을 경쟁사회로 몰아넣고 그들이 끊임없이 긴장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아이들이 스마트폰이나 게임에 중독되는 것은 온전한 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당연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김 목사는 성경을 증거로 안식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하루하루 클라이맥스를 향해 진행됐으며 그 마지막은 안식이었다”며 “하나님께는 안식이 곧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예수님은 말씀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위로하며 기적을 베푸시는 일을 지치지 않고 행하셨는데 이는 안식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부모가 자녀의 발전을 바란다면 쉴 때와 일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천침례교회는 ‘쉼이 있는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각 교육부서와 성인 예배에서 안식의 당위성을 알리는 설교를 정기적으로 한다. 또 학생들을 주일에 쉬는 그룹과 쉬지 않고 공부하는 그룹으로 나눈 뒤 10주 뒤에 생활 습관과 성적 등을 비교하는 실험도 진행할 계획이다. ‘쉼이 있는 교육’ 캠페인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교회는 캠페인 사무국(02-3437-9731·edurest.net)을 통해 신청하면 된다. 참가교회는 캠페인 주간을 선정하고 쉼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며 관련 동영상을 상영한다. 교회 곳곳에 현수막과 포스터 등을 부착하고 교우들에게 관련 소책자와 상징물(사진)을 배포해 독려한다. 참가비용은 현수막과 포스터 제작비 등을 포함한 기본비용 10만원과 참여 교인 1인당 1000원씩의 소책자 및 상징물 제작비용, 광고비 10만원(선택) 등이다. 광고비는 캠페인의 취지를 알리고 참여를 권하는 신문 등의 공익광고를 후원하는 데 사용된다. 좋은교사운동과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는 이번 캠페인과 함께 ‘학원 휴일휴무제’를 법제화하는 운동도 전개할 예정이다. ========================================================== 세월호에서 20명 건진 김동수 씨 눈에 비친 교회 모습 [인터뷰] "내가 돌보던 교인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목사는 무슨 생각으로 침묵하는가" 구권효 기자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씨(50). 그는 작년 4월 16일 세월호 안에서 소방 호스를 몸에 감고 승객들을 끌어 올렸다. 김 씨 때문에 배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사람이 20명이다.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옷 색깔 때문에 그는 '파란 바지의 의인'으로 불렸다. 김동수 씨의 다음 소식은 비극이었다. 올해 3월, 김 씨는 제주도에 있는 자택에서 흉기로 자신의 왼손을 그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때서야 일반인 생존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을 가졌다. 김 씨는 여전히 세월호로 생긴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워했다. 화물차 운전기사였던 그는 차가 바다에 가라앉아 생업을 잃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까지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해 주지 않았다. 안타까운 사연을 기사로만 접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김동수 씨를 만나게 됐다. 4월 12일, 낮은마음교회(오준규 목사)를 취재하러 갔는데 그날 마침 김 씨가 교회를 방문한 것이다. 자해 사건이 있고 난 후, 리멤버0416으로 활동하며 김 씨를 알게 된 강영희 집사가 오 목사와 함께 김 씨를 병문안했다. 그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김 씨가 낮은마음교회를 찾은 것이었다. (관련 기사: 한 작은 교회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김동수 씨를 만나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간 교회에 다니고 있다. 아내와 두 딸도 열심 있는 신자다. 김 씨가 겪고 있는 아픔과 함께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4월 29일,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김동수 씨를 만났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김 씨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신의 몸을 상하게 했을까 마음이 착잡해졌다. ![]() ▲ '파란 바지의 의인'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씨를 4월 29일 혜화동에서 만났다. 그는 이날 안산 트라우마 센터에 가려고 제주에서 올라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나는 껍데기만 남았다 작년이 아니다. 올해 4월 23일이다. 정부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화물차에 대해 배상해 준다고 해, 김동수 씨가 배상을 신청한 날이다. 빠르면 한 달, 늦으면 석 달 안에 배상금이 나온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김 씨는 말했다. "생존자 중에 화물차 기사들이 많아요. 화물차 기사들은 그 트럭이 생계유지의 유일한 수단인데, 그게 빠져 버렸잖아요. 저도 그렇고 다른 기사들도 아직 트럭 할부금도 못 갚았어요. 이런 참사라면 당연히 국가가 나서서 살 길을 마련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생존자들의 실태를 조사한다거나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다 우리가 나서야 했어요." 참사 이후 세월호와 관련한 핵심 어젠다는 '특별법' 제정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는 작년 11월 공포된 '4·16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및 안전 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특별법)을 말한다. 내용은 크게 진상 조사와 안전 사회 건설, 피해자 지원 대책으로 나눌 수 있지만, 진실을 규명하는 데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은 세월호 피해자 중에서도 희생자 유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진실 규명도 중요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생존을 위한 지원도 중요하다. 이와 관련한 법은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으로 올해 1월 28일 공포됐다. 세월호특별법은 유가족들과 시민단체들의 사투로 여론의 주목을 받은 반면, 피해자 구제와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법에 따라 '4·16세월호참사배상및보상심의위원회'가 올해 3월에야 구성됐다. 위원회가 희생자 가족들과 생존자들에게 구체적인 안을 제시한 시기는 참사 1년이 지난 올해 4월이다. 이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법에 화물차와 적재 물품에 대한 손해배상이 빠진다는 말이 있어, 작년 11월 김동수 씨와 다른 화물차 기사들이 들고일어난 적도 있었다. 김 씨와 화물차 기사들은 제주도청을 찾아가 원희룡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박태희 제주도 해양수산국장과 면담하러 가는 도중 공무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생존자들이 직접 찾아가 뜻을 전달해 겨우 만들어진 특별법이었다. "참사 6개월 지나고 나서부터 몸 상태가 이상해졌어요. 생각 따로 행동 따로. 가끔씩 내 몸이 아닌 것 같이 느껴져요. 잠도 안 오고. 목욕탕에 가도 찬물은 괜찮은데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온몸이 베이는 것처럼 아프고. 계속 약만 먹으니까 위장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 8일 입원했는데, 세월호와 관련 없는 증상이라고 해서 입원비 170만 원을 자비로 충당했어요. 작년 12월까지 긴급생계비로 4인 가족 기준 108만 원을 받은 것 외에 정부는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어요. 그걸로 네 가족이 살기도 어려운데, 저는 병원, 안산 트라우마 센터, 서울 광화문, 진도 팽목항, 광주 법원을 수시로 오갔으니 턱없이 부족하죠. 그마저도 올해부터는 끊겼어요. 지금은 아내 혼자 버는 거죠. 시민들이 성금 보내 준 걸로 보태고. 가족들과 교회 사람들, 동창들이 조금씩 도와주고 있어요." 김동수 씨의 아내는 건강이 좋지 않다. 결혼하기 전부터 간경화가 있어 계속 약을 먹었다. 20년 넘게 약을 먹으니 신장까지 안 좋아졌다. 작년에는 종양을 떼어 내는 큰 수술도 받았다. 현재 아동 센터와 논술 학원에서 교사를 하고 있지만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다. 당장 생계를 유지할 돈도 문제지만, 또 한 가지 큰 고통은 참사 이후 남은 트라우마였다. 그는 인터뷰 중에도 몸이 자기 몸이 아닌 것 같다며 자주 손을 주물렀다.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보면 세월호 안에 있던 단원고 아이들이 생각나고, 창문만 보면 해경 보트를 타고 빠져나올 때 배 안에서 창문을 두들기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고, 잠을 자도 악몽을 꾸는 날이 많았다. 낮에는 좀 괜찮은데 밤이 오는 게 두렵다고 했다. "다른 화물차 기사들 중에는 화물차를 한 대 더 마련하고도 일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일하려면 다시 배 타고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배에서 잠을 못 자겠다는 거예요. 저도 몸이 이상해서 웬만하면 운전도 안 하려고 해요. 이건 완전히 산송장이에요. 그냥 껍데기만 남아서 병원 치료나 받고…. 차라리 죽어 돌아왔으면 어땠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안 좋은 생각을 해요." 김동수 씨는 멋대로 움직이는 자기 몸이 싫어서,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게 싫어서,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는 심정에 자기 손을 그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자해는, 그날 이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린 한 남자가 낼 수 있는 유일한 비명이 아니었을까. ![]() ▲ 오준규 목사와 강영희 집사, 조미선 집사, 하명동 씨가 3월 23일 김동수 씨의 입원실을 찾았다. 오 목사가 김 씨의 손을 잡고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오준규) 예수님이 가신 길은 베푸는 삶, 욕심내는 교회 보면 못 참아 김동수 씨는 심지가 굳은 신앙인이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삶과 다른 모습이 보이면, 아무리 목사에게라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다. 수십 년 다닌 교회에서, 목사가 양로원에 욕심을 내자 교인들의 만류에도 이를 지적했다. 한바탕 갈등을 겪은 후 그는 쫓겨나듯이 교회를 나와야 했다. 이후 아내가 다녔던 교회를 7년간 다녔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그 교회도 떠났다. 몇 해 전부터 여러 교회를 전전하다가, 최근 교인 40여 명의 작은 교회에 정착했다. 따로 성경 공부를 한 것도 어려운 신학 서적을 읽은 것도 아니었지만, 김동수 씨는 헌금과 주일 성수를 심하게 강조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 규모가 커지면 안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있던 교회들도 그랬어요. 처음에 작을 때는 괜찮았는데 커지면서 이상해지더라고요. 헌금도 너무 강압적으로 내라고 하고, 십일조 안 내면 시험에 빠진다고 하고. 가계가 적자인 사람은 십일조 못 낼 수도 있잖아요. 교회가 교인들 형편보다 그저 돈 돈 돈…. 목사는 자가용 타고 다니는데 교인들은 버스 타고 다니는 거 보면 참… 이제 제대로 된 건가 싶죠. 농번기에는 야외 예배처럼 주일에 가서 봉사도 할 수 있다고 봐요. 하나님이 한 주에 하루는 쉬라고 했지만, 어려운 사람 있으면 도와야 한다는 게 예수님의 뜻이었잖아요. 그런데 교회는 주일에 무조건 예배당에 있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 유연함이 없어요. 교회는 작아야 하는 것 같아요. 교회가 작아야 교인마다 식구들 밥숟갈이 몇 개인지도 알죠." 그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어떤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았는데,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김동수 씨는 그냥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성격"을 가진 것과 "예수님이 가신 길이 좋아서"라고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성격이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길이 좋았어요. 가진 거 없이 베풀고, 그냥 주고. 너무 성경만 읽는 교인들 보면 좀 답답해요. 그렇게 성경을 보면 조금이라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몇 번 읽어서 뭐할까. 예수님의 삶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사는 게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누구나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가잖아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교회가 헌금이나 교인 수 같은 데에 욕심내는 거 보면 가만히 있기 힘들죠." 김동수 씨는 그렇게 나름대로 베풀면서 살았다. 바닷가에 살았던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뛰어들었다. 그렇게 몇 명을 살리기도 했다. 학창 시절 마라톤을 했던 경험을 살려,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운동 코치를 해 주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그가 소방 호스를 들고 뛰어다닌 것이 이해가 됐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몇몇 목사가 하는 짓이 이해가 안 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가진 신앙을 바꾸는 것도 무책임한 것 같고. 사람 봐서 신앙 가진 것도 아니고, 예수님만 보고 신앙을 가졌으니까요. 그래서 남이 핍박을 하든 욕을 하든 교회도 꿋꿋이 다닌 거고." 교회와 관련해 김동수 씨가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이 사는 안산에 있는 교회들의 태도였다. "안산 지역에 그 많은 학생이 중고등부 활동도 했고 부모들도 교회 집사이고 할 텐데, 왜 안산 지역 교회들이 나서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자신과 같은 교회를 다녔던 교인이고 중고등부 학생인데 그걸 보면서 조용히 있는 거 자체가 지금도 이해가 안 가. 내가 중고등부 교사였다면, 내가 성경 공부 가르쳤던 아이가 아무 죄 없이 죽었다면, 이건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목사는 물론이고, 그걸 보고도 조용히 있는 교사, 장로, 집사 들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 ▲ 김동수 씨는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고 있다. 진상 규명은 긴 싸움이 될 것 같다며 김 씨는 생존자들의 기억들을 모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진상 규명에 필요한 건 생존자의 기억 기자가 만난 김동수 씨는 의지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으면 자기 몸을 상하게 했을까. 자기 자식과 가족이 왜 죽었는지 알려 달라고 사투를 벌여야 하는 유가족, 정부의 방치 속에서 살아 돌아온 게 죄라고 느끼고 있는 생존자. 이들 중 누구라도 또 한 번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대한민국은 정말 무너질 것이다. 매일 매시간 자신을 추스르며, 김동수 씨는 세월호 참사를 길게 보고 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쨌든 진상을 규명하려면 생존자들 기억이 필요하다. 그는 차근차근 이런 기억들을 모으는 작업을 할 계획이다. 시작도 안 했는데 이제 그만하자는 여론에, 특히 교회에 김동수 씨는 말한다. 세월호에 자기 자식이 탔었다면 그런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무고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과 함께 생각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 이것이 예수의 피값으로 산 교회란 말인가 [서평] 존 드라이버 <교회의 얼굴>(대장간) 정현욱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을까?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해 버린 한국교회에 소망을 둘 수 있을까? 성(性)과 돈에 영혼을 팔아 버린 듯한 목회자들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를 다녀야 하나? 목사인 나조차도 변명하기도 싫은 교회의 민낯이 수치감을 더해 준다. ![]() ▲ <교회의 얼굴> / 존 드라이버 지음 / 전남식·이재화 옮김 / 대장간 펴냄 / 280쪽 / 1만 4,000원 높은 도덕성과 겸손, 가난과 사랑이란 수식어를 가진 목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 높은 배기량의 차량을 제공받는 공무원과 기업인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목사들의 세계다. 교회는 자신의 신앙을 '버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하는 곳이 된 지도 오래다. 교회는 교회에 대한 회의감으로 신앙을 버리고 나간 수많은 교인들의 공백으로 인해 금세 쓰러질 것 같은 중심이 텅 빈 고목(古木)이 되고 말았다. 위기를 넘어 멸절(滅絶)하고 말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제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교회란 무엇인가?'이다. 폭력과 배신, 불신과 적의가 가득한 교회가 진정 처음 예수가 자신의 피값을 주고 세운 교회일까? 참으로 의아하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교회는 무엇인가? 말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계급과 서열, 진리를 지키기 위해 쌓아 놓은 배타성이란 높은 담장이 교회의 정체성일까? 혹시 교회를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깊은 목회적 회의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빛이 되어 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존경하는 강해자인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을 강해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지금 이보다 더 긴박한 질문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복음이야말로 오늘날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하는 일은 무엇이며,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가장 긴박하게, 그리고 시급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교회란 무엇인가?'이다. 거두절미하고, 저자가 말하는 교회를 찾아가 보자. 저자는 남미에서 평생을 바쳐 선교사로 헌신했고, 현지인들과 해방신학자들에게서조차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릴 만큼 가르침과 삶이 동일했다. 그는 "교회는, 부르심의 본질상 선교하는 곳이어야 한다"(19쪽)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경험하고 전달하는 인간 공동체"이며, "거룩함으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대조 공동체"(33쪽)이다. 교회는 달리는 자전거처럼 선교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즉 영혼을 구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며, 선교는 교회의 존재 방식이자 존재 이유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대조 공동체로서 존재할 때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교회의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치명적 결함 교회에 대한 바르지 못한 왜곡은 매우 일찍 시작되었다. 4세기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승인과 국교로의 전환은 교회를 이해하는 치명적 결함을 가져왔다. 핍박받던 교회가 핍박하는 교회가 되었고, 관용하고 포용하는 교회는 정죄하고 핍박하게 되었다. 특히 제국의 이미지를 빌려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교회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그 후 결코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지 못했다"(27쪽). 작금(昨今) 교회의 이미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이 아닌 세속적이고 제국적인 이미지를 빌려 옴으로 교회의 그릇된 정체성이 일어났다. 제국적 이미지는 로마가 타국을 자국의 문화와 법에 복종시키듯, 교회가 선교라는 명목으로 선교지의 문화를 지배하고 복속시킨다(29쪽). 이러한 왜곡과 오류는 교회가 성경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세상을 닮아 가려는 유혹 속에서 일어났다고 단언한다. 아브라함의 소명(召命)과 출애굽 사건을 통해 나타나듯 성경은 탈(脫)제국적 이미지가 하나님이 계획한 교회임을 보여 준다. 올바른 교회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는 세속적이고 제국적인 모델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이미지 알아 둘 것은 교회를 논함에 있어서 조직신학적 정의나 도그마적 촌평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성경에서 그 뿌리를 찾아 간다. 순례 이미지(그 길, 임시 체류자, 가난한 사람들), 새로운 질서 이미지(하나님나라, 새로운 창조, 새로운 인류), 백성 이미지(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 목자와 양떼), 변혁 이미지(소금-빛 그리고 도시, 영적인 집, 증언 공동체)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과 추구해야 할 양태(樣態)를 제시한다. 교회에 대한 네 가지 이미지는 결국 세상을 변혁시키라는 교회의 사명과 직결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 임함이며, 장차 도래할 천국의 가시적 표지이다. 교회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확장시켜야 한다. 교회의 존재 방식은 철저하게 성경에 뿌리내려야 하며, 성경을 통해서만 교회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본다면 선교는 한때의 붐도 아니고, 어느 부서가 관장하는 프로그램은 더더욱 아니다. 선교하는 교회라는 성경적 이미지로의 '급진적 회귀'(58쪽)가 있을 때 진정한 교회의 얼굴을 찾을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급진적 회귀를 몇 가지만 분석해 보자. 예수의 길의 급진성 예수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다. 제자도, 즉 제자의 길은 예수의 길이며, 예수가 가는 길을 뒤따르는 것이다. 예수는 길 위에서 자신의 배신과 배척, 죽음을 이야기한다. 예수의 길은 정확하게 아브라함이 걸었던 길이고, 이스라엘의 걸었던 출애굽과 광야의 길이다.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드러나는 '길'은 타자를 위한 대속과 죽음의 길이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또한 타자를 위한 고난의 길'(67쪽)이어야 한다. 결국 예수가 길이다(요 14:7). "길이란 악의 세력과 갈등 가운데 있는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표지 아래서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 고난받는 증인의 순교자적 교회 안에서 강력하게 전달되는 이미지이다. 이것들이 상실되면 그 이미지가 갖는 힘도 상실될 수밖에 없다." (71쪽) 길의 이미지는 타자를 지배하는 방식의 제국적 이미지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길의 이미지는 두 번째 이미지인 '임시 체류자' 또는 '나그네'와 '외국인'에서 더욱 강화된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믿음의 족장들을 '나그네'로 표현하며, 베드로 역시 '나그네'로 부른다. 이뿐이 아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은 요셉에 의해 배타적 소외를 당해야 하는 '나그네'로 존재한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주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임시 거주자"(레 25:23)라고 선언한다. 그들은 여전히 길 위에 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자비하심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리하는 자들의 공동체"(75쪽)이다. 교회는 지배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나그네이며, 천국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길 위에 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교회는 단 한 번도 교회가 제국적 이미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 나라처럼 왕을 허용했을 때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의 임박한 심판을 통해 경고"(41쪽)했다. 대안이 아닌 대조 공동체로서의 교회 저자는 교회를 '대조 공동체'로 소개한다. '대조'의 사전적 정의는 '둘 이상인 대상의 내용을 맞대어 같고 다름을 검토함'이다. 대조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세상의 대안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세상과 본질상 같지 않음으로 인해 변혁을 요구한다. 앞서 언급한 제국적 이미지는 거주하는 이미지다. 그러나 교회는 길 위에서 걷고, 잠시 체류할 뿐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세상적인 지배 체제와 악에 대해 한 공동체를 외국인으로 살게 함으로써 그 안에서 진정한 구원 복음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85쪽). 동적(動的)인 교회는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이어야 한다. 교회는 어떻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가? 제국은 존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억압과 폭력이 동반된다. 그들에게 칼과 창이 없다는 것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용서와 평화, 섬김과 희생으로 존재한다. 성경은 제국적 이미지를 끊임없이 저항하고 고발한다.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라는 도시에서의 도피, 애굽이라는 제국에서의 탈출, 이방 나라를 닮아 가려는 제왕적 통치 방식에 대한 선지자들의 통렬한 비판 등은 교회는 인간의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만을 인정하려는 존재 방식에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 백성이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체제 전복적인 행위"(109쪽)이다. 교회는 새로운 질서로 재편된 곳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다. 계급과 서열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한 몸이며, 지체이다. 구분은 있으나 차별은 없다. "예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메시아 공동체로 초청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여성이나 가난한 자들, 실패한 자들이나 어린이들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사회질서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양식임을 보여 주셨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지향한 비전이었다." (140쪽) 대조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과 확연히 구분했고, 존재 방식 자체가 다름을 보여 준다. 자끄 엘륄이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말하듯,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니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대조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미지는 '소금과 빛, 산 위의 도시'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이것을 '변혁적 이미지'의 범주로 묶었는데 잘한 일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변혁 시킨다. 구약 제사에서 소금은 제물을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고, 맛을 낸다. 모든 제사에는 소금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레 2:13). 소금은 하나님과의 언약이며, "그 언약 관계 위에 희생 제사 제도가 기초하고" 있다(208쪽).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하기 위해 '사회의 가치관에 순응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지리적 영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빛이 어둠을 밝히고 모든 것을 드러내듯 교회는 세상 속에 있되, 대조 공동체로 존재함으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급진적인 삶을 살아가고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이다"(213쪽). 나가면서 그리 두껍지 않는데도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교회의 이미지에 상당한 변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추천한 풀러신학대학교의 윌버트 R. 쉥크 교수는 이 책이 "교회의 이미지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와 기능을 회복하는 동시에 그동안 하나님의 더욱 완전한 뜻을 은폐시켜 왔던 잘못된 해석과 악습을 낱낱이 보여 주고 있다"(11쪽)고 평하는데 옳은 말이다. 실천이 극미(極微)한 관념적 신앙관을 견지(堅持)하고 있는 장로 교인으로서 이 책은 굉장히 도발적이다. 제도적 형식과 개인주의적 신앙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현대의 교인들에게 존 드라이버의 교회의 얼굴은 진정한 제자도와 교회의 존재 방식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보여 준다. 교회에 희망이 있는가를 물었다. 결국 교회만이 희망임을 새롭게 발견한다. 로이드 존스의 사도행전 서두에서 가장 긴박한 질문 '교회란 무엇인가?'는 교회만이 희망이고, 제국적 이미지로 왜곡된 교회의 이미지를 벗어 내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의 급진적 회귀를 통해 진정한 교회로의 회복하는 데서 그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교리의 주변부에 밀려나 있고, 때론 상황 논리에 함몰되어 잃어버린 예수가 꿈꾸었던 교회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성경에 탄탄하게 뿌리내린 저자의 교회론은 교회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와 도전이 될 것이다. 정현욱 / 로고스서원 연구원, 반석교회 부목사 ============================================= 박재필 목사, 국무총리 표창 ![]() [중부매일 이민우 기자] 청북교회 박재필(53) 목사는 8일 제43회 어버이날을 맞아 지극한 효행과 지역사회에 헌신, 봉사로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다. 박재필 목사는 청북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역사와 이웃에 공헌하는 교회'로 목회방향을 정하고 그 실천사항으로 지역 내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겪는 아픔을 진심으로 함께 나누는 선행을 펼치고 있는 성직자이다. 박 목사가 청북교회에 부임해 최근 4년 동안 펼친 선행을 살펴보면, 지역내 개안수술 대상자를 서울 실로암안과병원과 연계해 무료로 진료 및 수술을 받게 도와줬다. 또한 매년 설 명절과 추석에는 소외주민 120여 가구를 선정해 사랑의 쌀을 전달했고, 겨울철에는 차상위계층 30여 가정에게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연탄 300장씩 지원하는 선행을 펼치고 있다. 또한 주거환경이 열악한 가정에게는 매년 2∼3채씩 '사랑의 집수리'사업을 통해 행복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으며, 관내 소년소녀가장에게는 장학금을 전달해 학업의욕을 복돋아 주고 있으며, 국외에도 봉사단체 월드비전을 통해 아프리카 잠비아 등 200여 명의 어린이를 매달 후원하고 있다. 이러한 선행은 생활이 어려운 주민에게는 희망을 되찾아 주는 소중한 사랑의 손길이 되고 있으며,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마음은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민우 ========================================================== 美 10대들 200여명 자살 물결…영적전쟁 필요할 때 악령에 사로잡힌 사우스다코다 파인릿지 지역 십대들, 연쇄자살 장길남 기자 ![]() 사우스다코다주 10대들의 자살은 영적전쟁과 관계가 있다ⓒCreative Commons 지금 미국의 크리스천들은 영적전쟁에서 악령과 싸우도록 부름받고 있다. 지난해 12월과 금년 3월사이에 미국 사우스다코다주 파인릿지(Pine Ridge) 보호구역에서는 200명이상의 십대들이 자살했다. ‘론 허치크래프트 선교회(RHM) 대표 허치크래프트는 “이는 우리가 봐 온 것 중 가장 심각한 연쇄자살”이라면서 “이는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악령과의 영적전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악령은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오는 것인데 12세 소녀가 목 메달아 죽은 장면을 상상해 보라. 12세 소녀가 죽기를 결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그라라 라코타(Oglala Lakota) 종족의 고향인 파인릿지는 피를 흘리는 일과는 무관치가 않다. “파이릿지는 인디안 시대 말기에 발생한 대량학살의 장소였다”고 허치 크래프트는 말했다. 1890년 12월 29일 200-300명의 라코타 종족이 미국 기병대에 의해 살해됐으며 1891년 1월 3일 146명의 라코타 종족이 한 곳에 파묻어졌다. 시체들은 파인릿지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발견되었다. 이와같은 어두운 역사의 순간이 지나자 학대와 극심한 가난 등 억압의 시기가 다가왔다. 허치 크래프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어 깊은 어둠이 아직도파인릿지를 움켜잡고 있다고 말했다. △ 유아사망율은 전국평균의 300배 △ 파인릿지 인구의 97%는 전국에서 최하위생활 △ 라코타 종족은 미국 어느 그룹보다도 수명이 짧아 △ 파인릿지 가정의 60%는 검은 곰팡이 감염 이곳에서 10대들의 자살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파인릿지의 자살률은 전국평균의 150배에 달한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은 국가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파인릿지 지역에 정신과 상담자들을 보내 10대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허치 크래프트는 이곳의 자살물결이 영적인 문제라면서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영의 활동이 급격히 증가했음을 말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계속해서 “악령이 젊은이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들은 살아야 할 가치가 없다고 설득한다”고 설명했다. 허치 크래프트 선교회는 20여명의 인디언출신 젊은이들을 파인릿지로 보내 그리스도의 희망을 나누었다. 허치 크래프트는 “이는 악령과의 영적전쟁이기 때문에 정말로 기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고난의 의미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에 처한 이웃, 그 곁에 머물러야 할 교회 최성수 고통과 고난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고통은 몸과 마음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가리키고, 고난은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이나 상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은 대체로 고통을 겪지만, 고통에 시달린다고 해서 고난 중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자신이 잘못된 행위 때문에 겪을 수 있습니다. 일의 진행 과정에서 오는 자연스런 결과인데,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평소에 건강 관리를 못해 병을 얻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고난을 생각할 때 도움을 주는 세 개의 틀은 요셉과 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먼저 요셉의 경우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와 그에 따라 불이익을 피부로 느끼며 사는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큰 고통을 겪습니다. 형제들에 의해 이방인 상인들에게 팔려 더 이상 아버지와 혈육의 동생인 베냐민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는 말로 그가 겪었던 고통을 쉽게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해준 꿈 해몽 덕분에 총리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의 고통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 무관하게 당한 일이었습니다. 꿈 때문에 겪는 일이었고, 아버지의 편애 때문이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때문에 겪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요셉 스스로 고백하는 바이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진행된 일의 결과였습니다. 이 말을 달리 말한다면, 세상의 생명을 살리시려는 계획에 따라 요셉과 그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요셉은 물론이고, 아버지 야곱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큰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형제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두고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생명을 구하실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요셉이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는 동안에 요셉은 아마도 이것을 고난이라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 때문에 일어났다고 알진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고, 심지어 강한 유혹이 엄습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놓치지 않았으며,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의 고백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그가 고통과 시련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요셉에 비해 욥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 때문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고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조차도 오해했을 정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이해한다면,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하지 않은 갑작스런 사고를 당했을 때, 혹은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에도 병을 앓게 되었을 경우입니다. 이처럼 예상치 않은 불행한 일 때문에 겪는 고통은 심지어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욥의 아내는 남편이 고통을 겪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욥의 상황을 두고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 욥에게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욥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욥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신앙에 따라 고백은 했지만, 현실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욥의 상황에 비춰본다면,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해도 고통의 이유는 밝혀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통에 시달리는 이유를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견디기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욥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의 이유가 나의 잘못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면 그 후에 오는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욥이 당하는 고통과 관련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고통을 겪는 성도들에 대한 교회의 책임입니다. 특히 욥의 아내나 친구들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면,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을 보고 그들의 게으름이나 무능이나 혹은 숨겨진 죄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사각지대에 놓인 "세 모녀의 죽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회는 무엇보다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을 찾아서 위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들이 숨겨진 곳에 있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그들과 깊은 연대 의식을 갖고 함께 고통당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체로 고통을 당할 때, 감당하기 힘든 이유는 고통 자체보다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에 비해 더욱 행복하게 보이는 것도 고통을 가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연대 의식을 갖고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욥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욥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면서 고통을 당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피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 고통을 당했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었습니다. 욥의 경우 생명만은 보존될 수 있었던 상황보다 더욱 나빠진 경우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해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고난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욥의 경우와 비교해서 차이가 있다면,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뤄지도록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드러났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뤄지도록 순종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제자들 역시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을 정도입니다. 사도바울도 서신서를 통해 고난을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바울의 편지를 읽는 성도들이 항상 그러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 서신과 베드로서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고통을 겪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교회 역사에는 순교보다 배도와 배교의 행위가 더욱 많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뜻과 생각에 따라 살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대상으로 행하는 일들은 대개 인간의 의지와 바람에 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고통을 수반하는 힘든 일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인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내 뜻과 바람과 다르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순종하거나 혹은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했을 때,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되었을 때, 바로 이런 때를 가리켜 고난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고난은 기독교인이 이 땅을 살아갈 때 결코 피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이유를 알든 모르든 기독교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기독교인에게 삶의 환경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서 이뤄지길 원한다면, 기독교인은 고난을 결코 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해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세상 가운데 나타낼 수 있습니다. 고통과 함께 사는 삶이 쉽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진정한 기독교인은 고통과 더불어 살면서도 감사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문제에 너무 몰입하지 않고 시선을 옮겨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길 기대하며 약속을 소망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최성수 / 하늘땅사람교회 담임목사. 서강대 철학과, 독일 Bonn대학교 선학석사·신학박사, 영화 및 문화 평론가, 시인. ================================ 목회자 윤리 강령 목회 윤리를 바로 세우자 일곱 번째, 목회자는 정치적 활동이 아닌 말씀과 기도를 위해 부름받는다 구약시대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다(출 12장). 그 후 사무엘(삼상, 삼하)을 비롯한 선지자들은 적극적으로 가나안에 이스라엘을 세우는 일에 협력했다. 나중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계승직인 왕과 제사장들의 불의를 비판하며 견제했고 더 나아가 선민 사회의 불신앙과 불의도 경고했다. 이 시대 선지자들의 정치 참여는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 예수님을 비롯한 사도들은 정치에 전혀 무관심했다. 예수님은 모세처럼 왕궁에서 출생하거나 자라지도 않았다. 메시아임을 주장하는 예수님은 로마의 식민 아래 고통을 당하는 동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생각과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나중 사도바울은 세속 정권에 굴복하라는 권면까지 한다(롬 13:1-5). 그는 로마서에서 11장까지 교리 부분을 설명하며 이런 성구로 끝낸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그리고 12장부터 윤리적 권면이 기록된 가운데 세속 정권에 굴복하라고 충고한다. 예수님과 사도바울 사이 정치관 면에서 어떤 차이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구약시대 이방 나라들과 다르지 않은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세워진 하나님나라였다. 이스라엘에서 종교와 정치는 하나였다. 왕, 제사장과 선지자를 비롯한 백성은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했다. 이방 나라와 달리 '법치'가 실현되었다.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은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삶을 살아야 했다. 그것은 바로 신앙 삶 자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대는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 주전 500여 년 전 멸망당하며 나라를 잃었다. 포로 귀환 후 고토에 다시 돌아와 세운 유대 나라는 정치력을 상실했고 종교적으로 존재했다. 이것은 로마제국이 통치한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되었다. 예전 하나였던 국가와 교회가 철저히 분리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했다. 그러나 구약의 모세처럼 동족(同族)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도 그런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마저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유대인의 나라는 이 지상에서 약 2,000년 동안 사라졌다. 이후 회당이 불신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교회가 신자 유대인들에게 각각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나라를 잃은 후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더더욱 정치 참여를 꿈꿀 수 없었다. 그러나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됨에 따라 나라마다 민족 교회들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신자들의 정치 참여 문제가 대두되었고 해석에 따라 신학과 교리도 나누어졌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세속 정치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기록한다.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의 형태를 전혀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써 국가 영역과 교회 영역이 분명하게 나누어졌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이를 잘 알았다. 이를 이해한 칼빈주의는 이를 영역주권(領域主權)이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은총 면에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나라 사이 차이는 너무나 크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에서 하나님을 대신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 영역에 하나님을 대신한다. 아담의 타락 사건 후 하나의 인류가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특별 은총에 따라 신자들을 돌본다면 일반 은총에 따라 불신자들을 돌본다. 그리고 세속사에서 세상 나라가 주인공이라면 구속사에선 교회가 주인공이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영역의 주인은 동일한 하나님이다. 두 영역이 대립하거나 충돌될 수 없다. 두 영역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서로 협력하고 나아가 서로 존중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의 교회론과 목회학은 원리적으로 성경의 이런 정치관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부활한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 권세를 굴복시키지 않고 그냥 승천했다. 그가 남긴 목양 명령(요 21:15-17)과 선교 명령(마 28:18-20)에 따라 교회는 예수님의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는 제자들을 양성하여 세상으로 배출시킨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사역이다. 신자는 세상 시민과 하나님나라 시민으로 지상 삶을 산다. 이 덕분에 신자들은 선량한 세상 시민으로 살 수 있다. 이로써 신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다. 서서히 인류 사회는 개량되며 변혁된다. 서구 유럽에서 이런 변혁은 거의 2,000년 동안 진행되었다. 그 결과 18세기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문화권에 속하는 서구의 나라들이 모든 면에서 세계를 주도한다. 그럼 교회는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가? 교회는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사역 ― 복음 전파, 양육과 파송 ― 이 어떤 정치적인 이유로도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다. 이 사역은 예수님 재림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교회는 신자들의 사회참여를 통해 얼마든지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교회는 악한 정부를 상대하여 정치적으로 항쟁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먼저 성경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타락 사건 이후 하나의 인류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서로 싸울 것이다(창 3:15). 이 싸움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뱀의 후손에 속하는 인류를 다스리도록 사단에게 허용했음을 뜻한다(엡 2:2-3). 이 세상에 완전히 의로운 정부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한 동안 백성을 잘 돌보는 의로운 정부도 출현할 수 있다. 인류 역사도 의로운 정부와 불의한 정부가 시간을 달리하며 출현했다고 잘 증언한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인류를 징계하거나 징벌하기 위해 독재자를 보낼 수 있다(호 13:11). 그를 보낸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영적 안목을 신자는 가져야 한다. 세월호 사건에서 현 정부의 잘못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 비극은 그 동안 불의와 병폐가 한국 사회의 곳곳에 쌓이고 쌓여 곪아 터진 결과이다. 이를 인정치 않고 정부만 탓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자연법이나 양심을 계속 어긴다면 언젠가 대재난을 만난다. 이때 재난은 물론 인재(人災)에 속한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된다. 재난의 원인은 인간의 잘못에 있고 하나님은 주인으로서 자연에 심겨진 법에 따라 불의한 인류 사회를 심판할 뿐이다. 인간의 잘못을 못 본 체하고 하나님만을 탓하는 자세는 인류 사회를 절대로 개선시키지 못한다. 세월호 같은 사건에서 교회와 교인은 상식적 안목은 물론 영적 안목을 갖고 하나님 앞에 회개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교회는 이런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목회자의 사역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 영역에 속하는 복음 사역을 맡아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전적 소명과 사명을 받는다. 이를 소홀히 하고 정치에 개입하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선과 후를 분별하는 지혜를 잃은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는 음식이 아닌 생명을, 그리고 의복이 아닌 몸을 돌보는 사역에 몰두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충고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마태복음의 산상수훈(5~7장)은 향후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질 하나님나라를 전제하며 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이다. 교회와 목회자는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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