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32:1-4/ 크리스마스 때 오신 사람/ 조용기 목사
2014-09-20 13:59:42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크리스마스 때 오신 그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는 단지 유대인의 종교적인 지도자로 오셨습니까? 정치가로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철학가로 오셨습니까?

크리스마스에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우리가 분명히 가지면 우리의 생애 속에 놀라운 은총과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귀한 지식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의 수준에서 볼 때, 유대 종교의 율법에 박통했고 헬라의 철학에 일가견이 있었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귀중하여 세상 모든 것은 분토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절로 9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오늘 읽은 본문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귀중한 지식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복과 은혜가 넘치게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본론>

1.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첫째로, 성경은 예언하여 말씀하기를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사막에서 광풍을 만나면 모래 산이 순식간에 동서남북으로 옮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래 산이 있는 곳에 가서 결코 높은 산을 지표로 삼을 수 없습니다.

언제 광풍이 불면 3km 이상 되는 높은 모래 산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모래폭풍이 옮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막의 광풍을 만나면 사람도 짐승도 순식간에 매몰되어 버리고 구출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와 같은 광풍이 인생에 다가오는 것을 봅니다. 미국에는 태풍을 허리케인이라고 말합니다. 금년에 허리케인이 불어와서 뉴올리언스라는 유서 깊은 도시 하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거대하고 무서운 허리케인이 도시 하나를 온통 삼켜 버리고 없앤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불어오는 광풍도 그러한 것입니다.

죄악의 강풍이 불어오면 죄악이 인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볼 때 정치라는 이름으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까? 수천만 명이 죽고 짓밟히고 자유를 잃어버리고 비통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죄악의 광풍이 이 지구상에 끊임없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은 공산주의라는 광풍이 불어와서 국민들이 먹을 권리도 없고 입을 권리도 없고 치료받을 권리도 없고 이주의 권리도 없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자유와 권리도 없는 속박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광풍인 것입니다. 이런 죄악의 광풍이 이 땅에서 불어올 때 이 죄악의 광풍을 피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뿐입니까? 세속의 광풍도 끊임없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문화, 퇴폐적인 세속화된 문화가 오늘 온 세계에 광풍처럼 불어오고 있습니다. 더구나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인터넷이나 셀룰러폰을 통해서 모든 사람의 생활 가까이에 세속적인 문화가 광풍처럼 불어오고 있습니다.

세속문화에 물들면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퇴폐하고 타락의 길을 걸어가게 되고 하나님과는 멀리멀리 등을 돌리게 됩니다. 또한 질병의 광풍도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마다 질병의 공포에 몸부림치고 있지 않습니까?

요사이 소이 말하는 조류독감이라는 것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 여기저기 지금 조금씩 생기는 것 같지만 이것이 광풍으로 변할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신종질병으로 알려진 조류독감은 과학자들의 조사결과에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질병으로 판정 되었습니다. 1918년에서 1919년 전 세계를 휩쓸며 무려 5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스페인 살인독감 바

이러스가 실은 조류독감 바이러스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 1년 사이에 5천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간 조류독감의 광풍은 오늘도 불어 닥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교통의 발전을 통해서 조류독감이 지구 이 끝에서 저 끝까지가 순식간에 전달되고 퍼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류독감이 광풍으로 불기 시작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지 모르는 위험에 처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또한 가난과 저주의 광풍이 있습니다. 서구라파 몇몇 나라와 미국과 기타 몇몇 나라를 빼고 난 다음 많은 나라들이 아프리카 전국토를 통해서 동남아, 남미 여러 나라에 기근과 저주가 횡횡하고 있습니다.

저주와 가난의 광풍은 이 지구상을 휘돌고 있으며 오늘날도 수많은 부지기수의 사람들이 굶주려 영양실조에 걸려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는 역사 이후로 이 가난의 광풍을 잠재워 보려고 녹색혁명을 일으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가난의 광풍은 잠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마귀의 흑암과 사망의 광풍이 불어 닥치고 있습니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마귀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자랑의 광풍의 노예가 되어 탐욕을 섬기고 탐욕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의 광풍을 피하지 못하고 다 이 세상을 떠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악의 광풍, 세속의 광풍, 질병의 광풍, 가난과 저주의 광풍, 마귀의 흑암과 사망의 광풍에 휩쓸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광풍에서 우리를 피하게 하겠습니까?

잠언 1장 27절에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두려움과 재앙과 근심과 슬픔의 광풍에 휩쓸려서 사람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광풍을 잠재울 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광풍을 십자가에서 잠잠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로만 광풍을 잠잠하게 하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그가 사람의 몸을 쓰고 인류공동체의 머리로 오셔서 인류에게 닥쳐온 이 광풍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 찢고 피 흘려 광풍을 잠재워 버리셨습니다. 예수님 품안만이 광풍을 피하는 피난처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사야 53장 4절로 6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에덴을 떠난 이후로 생긴 이 거대한 광풍을 예수님께서 다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잠재워 버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찢어진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를 구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셨으며, 시편 5편 11절에는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피할 곳이 생겼습니다. 광풍이 아무리 몰아쳐 와도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가 피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운동이 사회개혁과 사회부흥의 원동력과 밑거름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어올 때 사회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고 구원의 은총이 임합니다.

국제적십자사, 국제기아대책본부, 월드미션, YMCA, YWCA 등이 모두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운동에서 출발하였고, 유수한 세계 대학의 98%가 미션스쿨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광풍을 피해서 사람들에게 은총과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는 귀한 피난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조지 폭스의 구령운동이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사회운동이 되었고 그 영향으로 노예해방운동이 일어났으며 절제운동, 평화운동, 구호사업이 일어났습니다. 조지 폭스는 이러한 업적으로 1947년에 노벨 평화상을 탄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럽사회의 부흥도 역시 기독교 복음운동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독일사회의 부흥은 진젠도르프 백작을 중심으로 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서 30년 동안 종교분쟁으로 혼란했던 독일사회에 놀라운 정화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진젠도르프의 경건운동을 통해서 독일에 시민계몽운동, 이상촌운동, 협동조합운동, 형제단운동 같은 현실 부흥운동이 일어나서 독일사회를 안정시킨 것입니다. 덴마크 역시 프로이센과 헝거리의 침략을 받아서 완전히 나라가 망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전쟁에 패해서 사람들은 집을 잃고 사업 터를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귀중한 트루시아와 홀스타인 두 주를 빼앗기고 아직 북풍한설이 부는 얼음 땅 북부의 유투란두 반도밖에 남지 않아 덴마크는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럴 때 니콜라이 그룬트비 목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자! 조국을 사랑하자! 자연을 사랑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덴마크에 거대한 부흥의 운동을 일으켜 침몰하는 덴마크를 구출해 내었습니다. 당시 국민 고등학교 교과과정의 60%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운동을 통해서 덴마크는 부흥 발전하여 일어나 세계적인 부요한 문명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불어오는 죄악과 세속, 질병과 가난, 저주와 사망의 광풍은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잠잠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품만이 이 모든 광풍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광풍을 피하는 피난처가 되시기 위해서 그 날개를 활짝 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 품에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2. 그 사람은 폭우를 가리는 곳

둘째, 성경은 크리스마스에 오신 그분은 폭우를 가리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폭우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폭우가 쏟아져서 거대한 홍수가 나도 감당치 못하지 않습니까?

호남지역에 폭설이 쏟아져도 눈 폭탄으로 말미암아 입은 피해가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은 상징적으로 이 폭우를 하나님의 진노로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쏟아지는 폭우를 장난감 종이우산으로 가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사 세상을 심판하는데 인간의 선행이란 손바닥만 한 선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지 못합니다. 인간의 고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지 못합니다. 인간의 종교나 인간의 수행과 도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릴 수가 없습니다.

잠언서 16장 2절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야훼는 심령을 감찰 하시느니라”

아무리 위선적인 행동을 하고 사람보기에 근사하게 보여도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중심을 들여다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시편 1편 5절에서는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행위와 노력으로 마음에 평안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태교는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불교는 참선이나 선행, 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이슬람교 역시 매일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고 매년 한 달 동안 금식하며 일생의 한번은 메카로 성지순례를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힌두교도는 극심한 고행을 통한 구원을 주장합니다. 장기적인 단식, 걸식, 불속으로 뛰어들기,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기, 한쪽 다리로 서 있기, 가시덤불이나 우물위에 누워 생활하기, 몸에 재를 뒤집어쓰기, 손톱과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기 등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와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코 인간적인 행위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노력이나 고행을 통해서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은 폭우를 막으려는 장난감 종이우산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의 천정 밑에 나가야 폭우를 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모든 죄악과 불의를 다 가슴에 앉고 십자가에 하나님의 심판의 풍우를 만나시고 몸 찢고 피 흘려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극도에 달했을 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주님은 피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그 몸으로 다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들어오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폭우를 가리 울 것이 결코 없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현재 하나님의 진노는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죄악을 심고 나면 그 죄악을 현실에서 거둡니다. 내 당대에 안거두면 후대라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데 죄악을 심고 난 다음에 심판으로 안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잠하고 계시니 안 보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심고 거두는 법칙을 그대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9절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4장 10절에 “야훼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야훼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고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말세에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땅이 열렬한 불에 녹아지는 무시무시한 마지막 때의 심판이 임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우리들이 다 변화되어 공중에 올라가 주를 맞이하고 난 이후로 7년 환난이 이 땅을 폭풍우같이 휩쓸 것입니다. 그때에 모든 사람의 지은 죄가 다 드러나며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이 모든 사람의 발길을 태울 것입니다.

이사야 13장 9절로 11절에 “야훼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라고 하셨으며,

베드로후서 3장 7절에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최후심판은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지식으로는 폭우와 같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결단코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밑에 나와야만 이 폭우를 피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말할 필요 없이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내리시는데 그 하나님의 지옥의 심판은 그리스도 십자가 밖에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모시고 살다가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빛들의 근원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예수를 믿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죄악을 품에 품고 죄악의 썩어짐의 부패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이 되어 있다가 육신의 장막 집을 벗어지면 탐욕의 근원인 마귀와 함께 영원한 어둠으로 내어 쫓기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를 모시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영생을 얻었느냐. 그렇지 못하고 죄악의 부패를 그대로 품고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사느냐가 우리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날 때 영원히 갈 처소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심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광으로 그리스도 없이 죄악으로 부패하고 썩어진 삶을 산 사람은 영원한 지옥의 심판으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시록 20장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 우더라”, 또한 마가복음 9장 48~49절에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미래에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뭐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있느냐. 또 있더라도 장차 미래에 다가올 것이니 지금 관심 가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순식간에 미래는 현재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없이 죽어 지옥에 들어가면 편안할 줄 생각하지만 그곳에서는 죄책도 꺼지지 아니하고 죄악의 고통과 슬픔이 구더기가 오물 먹듯이 괴롭힐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소금 치듯이 불 가운데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당도 확실하게 있고 지옥도 확실하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이상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반드시 분리하여 상주고 심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인류의 대표로 오셔서 우리 공동체의 머리로 우리 대신하여 죄와 불의, 죄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몸 찢고 피 흘려 다 갚으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사라지고 폭우는 그치고 하나님의 청명한 화평의 하늘이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로 나와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결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확실히 알아야만 합니다.

3. 그 사람은 마른 땅의 냇물

셋째로, 크리스마스에 온 그 사람은 마른 땅의 냇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물은 동식물의 생명줄입니다. 물이 사라지면 땅은 황폐한 사막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문명의 발상지는 모두다 강가에서 일어났습니다. 강물을 통해서 농업이 발달되고 상업도 발달되고 공업도 발달됩니다.

강 없이는 농사도 상업도 공업도 발전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고대문명은 다 강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중국의 황하유역, 인도의 인더스 갠지스 강 유역, 메소포타미아 즉 오늘날 이란 이라크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 애굽의 나일 강 유역에서 고대 인류문명이 발달된 것입니다.

서울의 기적은 서울의 한강이 젖줄기인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무슨 생명도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은 우리의 삶을 얻는데 필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크리스마스에 온 그분은 마른땅에 냇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황폐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냇물이 없으니까 냇물이 없는 것은 사막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몽고에 크나큰 광대한 고비사막을 보십시오. 가도 가도 모래둔덕밖에 없습니다. 그 고비사막이 왜 고비사막이 되었습니까? 물이 없기 때문에 사막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도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사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소망도 자라지 않습니다. 사랑도 자라지 않습니다. 의가 사라집니다. 평안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세상 쾌락의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저장하려고 하지만은 터진 웅덩이입니다. 저장하지 못합니다. 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빈손 들고 말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만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9절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야훼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야훼의 말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생수가 흐르지 아니하면 마음이 황무지가 되고 그것이 마음에 고통과 패망이 됩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십시오. 생명수가 없으니 마음이 황무지가 되고 그 결과로 어떤 삶을 삽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급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 생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른땅에 생수 같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생수의 강이 흘러나려면 우리 마음속에 모든 것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살아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옛날에 고대문명이 모든 강의 주변에서 발생한 것처럼 모든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가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 생수가 흐를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류대학을 나와야 성공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많은 지식을 얻어야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보면 올바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 역사를 볼 때 어떠한 나라가 흥하고 잘 되었습니까?

예수를 믿어서 생명의 강물이 흐른 개인과 나라마다 잘되었습니다.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황무지 같은 구라파가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모시고 생수가 흐르자 일류국가들이 되었으며 해적의 나라가 영국이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자 세계 일등 국가가 되었으며 황무지인 미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자 세계 초강대국으로 변화되고 만 것입니다.

6.25사변 이후 반세기 만에 우리 한국이 이렇게 잘사는 것은 5만 교회, 10만 주의 종, 1천2백만의 가슴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기 때문에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강물이 흐르면 농업도 되고 상업도 되고 공업도 되는 것처럼 강물이 흐르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이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됩니다. 왜, 북한이 공산주의를 주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는 황무지가 되어있는데 아무리 씨 뿌려봤자 나지 않습니다.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북한이 잘살려면 예수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자유가 주어져야 생수의 강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예수를 믿게 하는 교육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수의 강이 흘러야 배운 지식도 유용하고 기술도 유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강물이 흐르지 아니하면 마른 땅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공업을 일으키고 상업을 일으키려 해도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생수의 강물이 흘러야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하시겠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물만 흐르면 무엇을 해도 잘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살아나고 소망이 살아나고 사랑이 싹트고 의가 살아나고 평안이 넘쳐 나고 기쁨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넘쳐나는 것처럼 예수님이 계신 곳에 생명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12절에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야훼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 찌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스르 광야에 와서 사흘 길을 걸어가도 물이 없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나뭇가지를 꺾어 쓴물이 던져 달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해서 물 샘 열둘이 있고 종려 70주가 있는 엘림동산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엘림은 오아시스인 것입니다. 오아시스가 있으니까 사막 가운데라도 생수가 넘쳐나고 종려 70주가 있고 온갖 과일과 동식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막에 오아시스. 오늘날 이 세상에 사막 같은 광야에 무엇이 오아시스 입니까? 예수님이 오아시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의 엘림동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면 생수의 근원이 물을 넘쳐내기 때문에 어떠한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내린 결론을 보면 이렇습니다.

최후의 현인이라 하는 소크라테스는 “나는 나의 무지를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는 “나는 죄를 씻기 위해 무릎이 닳도록 기도했다.”고 말했습니다.

동양의 성인이라는 공자는 “나는 미래를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는 “너희 구원. 즉, 해탈은 너희가 힘써서 성취하라”고 말했고, 인도의 태양이라 일컫는 간디는 죽기 2주 전에 “오, 나는 괴롭다.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괴테는 죽을 때 “빛이 그립다. 문을 열어다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님은 마른땅에 온 생수 같아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네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소크라테스와도 다르고 공자와도 다르고 석가와도 다르고 마호메트와도 다르고 간디와도 다르고 예수님은 그가 바로 생수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가슴속에 받아들인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에 서서 생수의 강물이 흘러넘치게 하십시다.

그러면 자유를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솟아오르라. 생명의 강물. 솟아오르라. 넘쳐나라. 솟아오르라. 모든 일에 자유를 주리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수가 흐르면 자유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죄악도 세속도 질병도 저주도 죽음도 다 생수의 근원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모시십시오. 예수를 섬기고 매일같이 먼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모든 일에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물 덴 동산에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

4. 그 사람은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

넷째로, 그는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햇빛이 내려쬐이는 광야에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없는 곳에 지친 발걸음을 끌고 가는 탈진한 나그네에게는 큰 바위 그늘 밑은 생명과 소생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끝없는 광야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곳에 몸은 지치고 피 가나고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른데 태양은 자결하고 몸에 수분은 증발되고 죽을 수밖에 없을 때 큰 바위 그늘이 나타나면 그는 그곳에 피난처를 얻고 휴식을 얻고 생기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 땅은 삶이 곤비한 곳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태어난 사람마다 울면서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 웃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는 “할렐루야”하고 웃으며 죽는 사람 많습니다. 혹은 예수 믿는 사람이 죽을 때 “오,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셨다. 예수님이 수레를 가지고 오셨다. 아멘! 할렐루야!”하고 죽는 사람은 많지만 태어날 때는 다 “응아! 응아! 응아!”울면서 태어납니다.

그것은 이 곤비한 땅에 어떻게 살아갈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전부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마다 곤비한 땅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와 죄책이 내려 쬐이는 황야요, 삶의 허무와 무의미의 황야요, 죽음과 절망의 황야요, 끝없는 싸움과 분쟁과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의 황야인 것입니다. 이 곤비한 땅에서 지치고 피곤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는데, 우리의 생명과 심령은 어디에서 소생함을 얻겠습니까?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잠시 있는 것 같으나 곧 시들어지고 사라지고 맙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 세상에 전쟁과 전쟁 소문이 끝이 없습니다. 얼마나 곤비하고 피곤하여 살기도 힘든데 전쟁조차 늘 우리의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도 왜 이렇게 고통스럽습니까? 남북 간에 갈려있어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인권이 짓밟히고 그들이 인생으로써의 권리를 상실하고 있어도 우리 정부가 큰소리 못하는 것은 “북한을 건드려서 괜히 화를 자초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찌하든지 북한을 달래서 화해와 일치를 가져와야지 너희 인권고치라고 해서 그들을 자극해서 오히려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어떻게 할까 그래서 정부가 위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에 비극적인 인권말살에 대해서 우리가 같은 이웃으로써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은 잘 압니다.

우리도 알고 정부도 알고 있지만, “이 곤비한 땅에 전쟁이 일어나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절망할 테니까” 그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북한이 엄청나게 위조달러를 만들어 가지고서 돈을 찍어 내어서 온 세계 흩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도 알고 구라파도 알고 일본도 알고 우리 정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모른 체하고 고개를 내돌리고 “우리는 그런 것 모른다. 증명되지 않았다.”, “몰라!” 라고만 말합니다. 모르긴 왜 모릅니까. 다 압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이 곤비한 땅에서 북한을 자극해서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을 터이니 어찌하든지 자극을 피하자”고 정부가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정부 당국자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참말을 할 수가 없고 바른말을 할 수가 없고 담대할 수 없고 어찌하든지 자세를 낮추고 비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바로 곤비한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남북이 갈라져 있지 아니하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남의 나라에 대해서는 얼마나 큰 소리하고 당당할 수 있잖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루 속에 곤비한 땅에서 피하게 해달라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 국민 전체가 예수님의 바위 그늘 속에 들어오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인간들은 어떻게 하든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과 수고를 해왔습니다.

1912년 제네바 회의에서 세계 여러 나라 대표들이 모여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하면서 전쟁영구종식선언을 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젊은이들이 총알받이로 죽거나 엄청난 재산의 손실을 가져오는 파괴가 있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 선언을 한지 채 2년도 지나기 전인 1914년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므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4년에 걸친 전쟁으로 군인 1천만 명이 죽고 1천 1백만 명이 부상을 입고 재산의 피해는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종전 후인 1919년 1월 전성국의 27개국 대표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강화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의 문명은 멸망될 것이고 말 것이다”라고 하면서 국제연맹을 창설하여 스위스 제네바에 그 본부를 두고 이제부터 모든 국가 간의 분쟁과 문제들은 이곳에서 평화롭게 해결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부터 1939년까지 19년 동안 4천 5백 68회나 평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두 번 보름에 한번 꼴로 근 20년간 평화를 위한 조약과 회담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1939년 일어난 2차 대전으로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6년에 걸친 2차 대전으로 2천 7백만 명이 전사를 했고 전쟁에만 5조 1천억 불의 돈이 들어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도 사람들은 또다시 국제연합을 창설해서 전쟁을 방지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 이후에도 6.25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월남전, 이란?이라크 전, 소련의 동구권 침공, 쿠바전쟁들이 일어났고 지금도 미국과 이라크 전,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조약을 맺고 어떻게 평화를 가져오려고 해도 역사는 인간이 성공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강한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약한 자는 조약과 평화가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북한을 대할 때 우리 스스로 군비를 강화하고 우리 방위가 튼튼해야 침략을 안당하지 북한에 쌀 주고 비료주고 돈 주고 온갖 아양을 다 떤다고 해서 이것이 평화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평화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체가 튼튼하게 국방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미국과 멀어지면 안 됩니다.

미국과 우리가 관계를 강하게 해서 우리의 국방을 튼튼하게 해 논 바탕에서 가슴을 펴고 대화를 해야지 우리가 약해져서 평화를 구걸해서 평화가 다가오는 것은 인류역사에 한 번도 없습니다. 평화는 구걸해서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당당한 힘에 입각해서 평화의 조약을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강화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할 말은 하고 살아야합니다. 왜! 비굴합니까? 왜! 평화를 구걸합니까? 비굴하고 평화를 구걸할수록 평화는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북한 인권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해야 합니다.

북한이 위조화폐를 만들고 있으면 위조화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됩니다. 강하고 담대한 우리를 북한이 존경하지 약하고 비굴한 우리를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고 맙니다. 나는 이런 점에서 우리 정부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고맙게 생각하지만 방법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고 당당해야지 강하고 담대하고 당당하지 못한 상대는 절대로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 땅의 삶은 곤비한 삶입니다. 끝없는 싸움과 분쟁으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분쟁과 싸움을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그는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피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오면 주님을 의지하면 주께서 우리의 바위그늘이 되십니다. 죄악의 불꽃더위도 텅 빈 허무의 가슴의 황야도 죽음의 절망의 황야도 싸움, 분쟁, 고난의 삶도 예수님 바위 그늘에 들어가면 다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사야 40장 27절로 31절에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야훼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야훼,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곤비한 땅에서 야훼 하나님을 앙망하고 예수님을 의지하면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날로 날로 새로운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크리스마스 때 오신 이 한 아기의 위대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핏덩어리 어린 아기 마리아의 무릎에 얹어 응아! 응아!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 어린 아기, 그 어린 아기의 명칭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600년 전에 그 계시를 받고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누가 이것을 믿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이 핏덩어리 어린 아기로 태어나서 마리아의 무릎에 앉고 마리아의 젖꼭지를 물고자라면서 그가 바로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라고 일컫겠느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신 아버지로써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우리를 구원하는 반석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국경을 접한 상태에서 계속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두 나라가 있습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입니다. 이 두 나라는 1899년에 국경분쟁으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양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랑만이 양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다.

전쟁과 증오는 후손들에게 살상을 유산을 물러줄 뿐이라고 하며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국민들은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대포를 녹여 양국의 국경인 안데스산맥에 그리스도의 동상을 세우고 이런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후로 두 나라는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평화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 종교지도자들의 충고를 듣고 예수님의 바위 그늘에 들어가 국가분쟁의 고통이 사라지고 평화가 임한 것입니다.

끝없는 분쟁, 고통, 괴로움, 곤비한 이 땅에 우리가 쉴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바위 그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품에 안긴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면 그 은혜가 너무나 신기하여 사람들이 과연 그런 분이 이 세상에 오실수가 있는가. 정말 예수님이 그런 분인가 놀랄 것입니다.

이사야 32장 3절로 4절에는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너무나 신기해서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한번 들어서 만족할 수 없고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혼돈되고 공허한 곳에서 분명한 길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론>

크리스마스 때 오신 어린 아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막의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 우는 곳, 마른땅에 냇물,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같이 되어서 우리를 향하여 두 손을 활짝 펴고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 동서양을 막론하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도 좋으니 그리스도 앞에 들어오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신기하고 너무나 놀라운 구주가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으니 이 얼마나 경건한 일이고 기쁜 일입니까?

이 예수님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사막의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될 것이고 폭우를 가리는 곳이 되고 마른땅에 냇물이 되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이 땅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고 넘치게 얻을 수 있고 영원한 천국을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니 감사합니다. 이 그리스도 축복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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