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2:9-21/ 안식일 / 한경직 목사 2014-08-22 23:29:4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출 20․8) 우리의 시간 중 七분의 一을 성별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안식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물질은 十분의 一을 드리라는 원리를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도 七분의 一을 드리라고 하는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읽을 때 감사함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안식의 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즐겁게 안식할 날을 주셨던 것입니다. 七일 중 하루는 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피곤한 세계 인류에게 이와 같이 안식일을 준 종교입니다. 유교에 이런 계명이 없습니다. 불교에도 이런 계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만 있고 기독교의 감화를 통해서 이제는 전 세계에 이와 같은 안식의 축복이 미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기독교는 안식의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심신은 때때로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쉬는 가운데 피로가 회복이 됩니다. 병도 낫습니다. 새로운 정력이 축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면서 일하는 이들이 실상은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또 모든 일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의 내용을 보면 주일만 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과 딸에게도 안식을 주라고 하셨고 또 자녀에게만 안식을 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남종이나 여종들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너희 집에서 일하는 점원이나 직공이나 식모나 그 밖에 모든 고용된 사람들에게도 안식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 에 있는 짐승들까지도 안식을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크신 긍휼(矜恤)과 자비를 육축(六畜)에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식일은 심령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육신 생활을 위해서 엿새 동안 힘써서 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육신 생활로 인해서 우리의 심령이 침몰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신령한 세계를 앙모하는 날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은 전기가 있어서 그것으로 하지만 옛날 전기가 없을 때에는 탄광에서 석탄을 캐낼 때에 흔히 노새를 사용했습니다. 그건 노새가 흔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새를 부릴 때에도 한 주일의 하루를 바깥에 매어두고 쉬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안 하고 계속해서 어두운 가운데서 노새를 부려보니 눈이 어두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눈이 어두워지지 않기 위해서는 안식일이 필요하고 푸른 하늘 위를 바라보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접속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안식일을 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四 계명을 생각하면서 꼭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안식일은 어느 날에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요리 문답 五十九문에 있습니다.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七일 중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명하셨고 (이레 중 일곱째 날은 토요일입니다.) 그 후로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는 七일 중 첫 날로 명 하셨나니 그 첫 날은 일요일 곧 주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七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구약 전체의 제일 큰 일은 천지 창조의 일입니다. 인간까지 합쳐 이 우주의 창조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구약 시대에 있어서는 천지 창조를 엿새 동안에 다 마치시고 이래 중 마지막 날을 안식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죄악 가운데 빠졌던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는 일입니다. 이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 구속의 사업을 어느 날에 마쳤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마쳤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구속 사업을 다 마치신 그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 시대에는 토요일을 지키지만 신약의 은혜의 시대에 와서는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킴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을「주의 날」곧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 신약 시대에 와서는 특별히 이날을 축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열 한 제자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실 때에도 이 七일 중 첫 날에 꼭 나타나셨습니다. 성령을 이래 중 첫 날인 오순절 날에 보내 주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보면 이래 중 첫 날에 예배하러 모였든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二十장 七절을 보면『안식 후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모였더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안식 후 첫 날이란 말은 일요일 곧 주일이올시다. 고린도 전서 十六장 二절에는 『매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란 글귀가 있습니다. 매주일 첫 날은 일요일 곧 주일입니다. 그 때에 모여서 예배도 하고 헌금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계시록 一장 一절을 보면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계시를 받고 계시록을 쓰게 되었습니다. 칠일 중 첫 날은 그리스도 내지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요리 문답 六十문에 세 가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첫째는『다른 날에 합당한 여러 가지 세상 알과 오락까지 중단하고 모든 세상일은 쉬는 날입니다.』 둘째는 『그 시간을 공사예배에 사용할 것입니다.』 쉰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하고 노는 날이 아닙니다. 공적 예배 또 사사로이 예배하는 날입니다. 셋째는『사세 부득이한 일이나 선한 사업에 사용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마태복음 十二장을 읽었지만 이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그 때 유대 사람들과 주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가 밀 이삭을 비벼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비난이 타인의 것을 먹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배고플 때 먹는 것은 모세의 율법도 허락했습니다. 비난의 참 이유는 비빈다는 그 자체가 곧 타작하는 일이라 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것이 일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인자는「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의 뜻대로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해석대로 받아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을 사람에게 유익하게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안식일이 쉬는 날이지만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그것을 들어내지 않겠느냐, 이런 것을 부득이 한 일이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즉 선한 일, 복음을 전파하는 일, 병 고쳐 주는 일, 다른 사람을 돕는 그런 일은 해도 괜찮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데 이천 년을 지낸 오늘날에 와서는 여러 사회 형세가 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도로 발전된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 처에서 공장이 돌아가는 산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여야 오늘날 이 상황 속에서 안식일을 바로 지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원칙은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내 스스로 신앙의 양심과 성령의 지도에 따라 작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없는 것은 이 원칙에 의지해서 그때 그때의 경우를 따라서 작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런 문제는 자연히 사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꼭 같이 이날을 지키지 않는다고 옛날 바리새 사람처럼 비난을 하거나 정죄(定罪)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양심과 같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억할 것은 이 하루는 하나님을 위해서, 내 심령을 위해서, 봉사를 위해서 살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주의 날을 마귀의 날로 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를 짓는 날로 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이 날을 안 믿는 사람처럼 공일로 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날을 공일이라 불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일이올시다. 안 믿는 사람들은 공일이라고 해서 행사도 하고 놀기도 하고 별에 별 일을 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에 추종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기 특별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분주한 가운데 안식일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구경 가느라고 잊어버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공부하느라고 잊어버릴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무리 분주해도 이 날을 기억하여 바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 벽에 걸어놓은 시계는 한 주일에 한 번씩 꼭 틀어 주어야 시간이 맞습니다. 우리의 심령 생활도 매주일 한 주씩은 온전히 구별해서 지킬 줄 알아야 새로운 힘을 얻어서 인생 길을 바로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주일은 마치 메마른 광야 길 같은 인생 행로에 잇는 오아시스와 같은 것입니다. 샘물과 같습니다. 매주일 생명수를 마셔야 우리의 생명이 삽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안식일의 복락(福樂)은 이 다음 하늘 나라에 가서 영원히 누릴 하늘의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이 중요합니다. 이 날을 성별해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육신에 관한 일을 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 봉사가 제四 계명의 정신이올시다. 지금도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읽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할 것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 믿는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일 한 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께서도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一월 마지막 날은「나병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一九五四년부터 불란서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구미 각국에서도 세계 나병의 날로 정하고 이 날은 여러 가지 행사도 있고 특별히 나환자를 돕는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한국은 올해부터 이 날을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나환자를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꿇어 엎드려 간절히 빕니다.『주님이시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환자에게 손을 내미시면서『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문둥이를 만져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진해서 손을 내밀어 만져주고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잇길로 지나가실 때에 문둥이 열 사람이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 사람 모두를 고쳐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예수님의 이 정신을 계승하여 언제든지 우리 주를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나환자를 불쌍히 여겼고 이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제가 청년 시대에 성 프랜시스 전기를 보고 놀란 것은 이 프랜시스가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길을 걸어가다가 한 문둥병자가 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자기 옷을 벗어 그 문둥병 자에게 주고 그 문둥병자가 입었던 옷을 자기가 바꿔 입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성 프란시스는 전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문둥병 자를 치료해 주는데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근대에 와서도 성 다미엔은 하와이 몰로카이란 섬에 가서 문둥병 자를 위하여 봉사하고 전도하다가 자기까지 문둥병자가 되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병원을 먼저 설립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들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정부가 이런 일을 착안하기 전에 먼저 나병자를 위하여 병원을 설립한 것이 선교사들입니다. 대구에도, 전주에도, 여수에도 나병자를 위하여 병원을 설립한 것은 선교사들입니다. 유명한 순교자 손 양원 목사 같은 이도 일생토록 여수 나병원에서 봉사도 하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 세 사람의 선교사를 태국에 보냈는데 두 사람은 목사고 한 사람은 의사입니다. 의사 송 예근 박사는 방금 태국 챔마이라는 곳에 있는, 태국에서 제일 큰 나병원에서 천여 명이나 되는 나병자들을 고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에는 나병환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통계에 의하면 약 八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큰일입니다. 그 가운데 국립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이가 八천 五백 명, 기독교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이가 一천 八백 명, 자기 집에서 치료받고 있는 이가 一만 四천 七백 명, 치료받고 나은 음성환자가 정착해 있는 곳이 六十五개소인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약 一천 명, 이렇게 해서 八만 명 중 三만 五천 명은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四만 五천 명은 아직까지 치료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이들 가운데 주를 믿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잘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록도에 가보아도 그렇고, 병원에 가 보아도 그들의 진실 된 신앙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병원 조사는 없으나 정착자 일만 명 중 기독교인이 八천 七백 五十명이라고 합니다. 또 그 중에서도 장로교인이 제일 많습니다. 五천 六백 명입니다. 세계의 나환자 수는 一천 一백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시아가 가장 많습니다. 六백 五十만 명입니다. 여러분, 이 나병환자에 대해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나병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좋은, 약들이 많이 발견되어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병은 불치의 병도 아닙니다. 나병은 유전도 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재래로 나병과 나병환자를 두려워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관념을 온전히 버려야 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병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유를 충분히 받으며 다른 질병 환자와 똑같이 치료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정부도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특히 이들을 위해 조직된 대한나병협회는 이들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피얼스 박사도 기독교 선명회를 통해 고아만 도와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병자를 치료해 주는 병원만 세운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나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서울에 따로 병원을 세웠습니다. 어떻든지 이「세계 나병의 날」을 당해서 비록 우리가 이 날에 대해 관심이 부족했더라도 앞으로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들을 도와주고 어떻든 이들도 다른 동포와 똑같이 살 수 있도록 육신과 영혼을 구원해 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데 한 가지 요구되는 방법은 대한나병협회에 많이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돕는데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이것이 넷째 계명입니다. 이날을 성별하여 모든 세상일을 쉬고 하나님께 예배를 정성껏 드립시다. 그리고 모든 불쌍한 이들을 돕도록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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