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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그 치명적인 어리석음: 롬6:23, / 참된 행복: 롬4:3-8
2009-10-20 13:09:23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 설교, 2009-10-18

얼마 전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사촌 동생 집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동생네 집에 가게 되면 잘 들르는 일식 집엘 갔습니다. 음식이나 음식점 분위기가 꽤나 좋아 언제나 손님이 많던 식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눈에 띄게 적었습니다. 그 집은 스시가 유명한 집이었는데 스시를 50%나 할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식당은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습니다.

집회 중 그 지역의 목사님들과 함께 점심을 하였습니다. 한국 식당이었습니다. 그곳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점심값을 30% 정도 할인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금융위기의 여파가 한국보다 더 심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 한국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선 눈에 보이고 그냥 마음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만 이야기 한다면 미국이 한국보다 더 어려워 보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화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 걱정이지만 그래도 우리 한국은 저축문화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저축문화가 아니라 외상문화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도 집값을 월세로 내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어떻게해서라도 돈을 저축해 월세를 전세로 바꿉니다. 일단 전세가 되면 매월 월세를 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 저축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집을 삽니다. 물론 저축한 돈 만으로 전세를 얻고 집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출을 받아 어느 정도 빚을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빚보다는 저축의 비중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거의 저축의 개념이 없습니다. 왜 우리는 수입만 생기면 저축을 하려고 하고, 왜 미국은 우리보다 소득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저축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가난하고 사회가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앞 날이 불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소득과 사회와 앞날이 비교적 안정된 나라이기 때문에 구태어 저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집도 저축으로 사지 않고 외상으로 삽니다. 집 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외상으로 삽니다. 사실 외상도 능력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누가 외상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능력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면 별 문제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능력에 변수가 생기게 되면 당장 큰 문제가 생깁니다.

외상으로 산 집 페이먼트를 하지 못하면 원칙적으로 집에서 쫓겨 나야만 합니다. 외상으로 산 차 값을 몇 달 내지 못하면 차도 뺏겨야만 합니다. 저들은 쌓아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다든가하면 당장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저축이 있습니다. 그리고 재산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전세나 월세 보증금이라도 있습니다. 미국보다 버틸 힘이 큽니다. 보편적으로 볼 때 위기를 당했을 때 미국에서 집과 차는 부담이지만 우리 한국에서는 팔아먹고 얼마만큼은 버티게 하는 힘입니다.

한국은 어느 정도 전세금을 모을 때까지는 작고 불편한 집에서 월세로 삽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하지 않습니다. 전세금을 모을 능력이 있으면 그 능력으로 은행 빚을 얻어 미리 크고 편한 집에서 삽니다. 한국은 전세금을 모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꽤 오랫동안 작고 불편한 집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 불편감수가 저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그와 같은 불편감수를 하지 않고 미래를 당겨서 처음부터 편하게 살기 때문에 저축을 못하게 된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도 점점 소득이 높아져가면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미국화 되어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청년들이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함부로 카드를 쓰는 일을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카드는 우리 문화가 아니라 미국 문화입니다. 그것은 저축 문화가 아니라 외상 문화입니다. 저도 카드가 있습니다. 그러나 카드가 있다면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외상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남발하고 살다보면 나이가 들 수록 위험해 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업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월급쟁이와 사업가의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월급쟁이들은 보편적으로 월급을 받지 못하게 되는 노년의 때를 위해 저축하는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업가들은 대부분 빚을 얻어 사업을 합니다. 저들이 빚으로 사업을 하는 까닭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100이라고 하는 빚을 이용하여 200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행과 사람들은 저들의 그와 같은 능력을 보고 돈을 빌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빚도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큰 능력이 있는 사람은 큰 빚을 얻어 큰 사업을 하고 작은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작은 빚을 얻어 작은 사업을 합니다. 사업을 하여 돈을 벌게 되면 그 능력을 담보로 더 큰 돈을 얻습니다. 그 빚으로 더 큰 돈을 벌게 되면 그 큰 돈을 담보로 보다 더 큰 돈을 얻습니다. 그런방식으로 사업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사업을 키워가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입니다. 사람에게는 시간이 있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벌 때가 있으면 쓸 때도 있어야 합니다. 돈을 버는 목적은 돈을 쓸 때 쓰기 위함입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써야 할 때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법니다.

그러나 돈을 잘 버는 사람도 돈을 쓸 때 쓰지 못합니다. 두 가지 이유인데 첫째는 시간이 없습니다. 둘째는 돈이 없습니다. 번 돈은 거의 대부분이 더 큰 돈을 빌리는데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큰 돈을 빌린 상태이기 때문에 돈이 없습니다. 빚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람들은 지켜 보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도 가난하고 가난하지 않은 부자도 가난하기는 피차 일반이라는 것입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도 돈이 없고 부자도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꽤 오래전 다일공동체가 병원을 세울 때 천사운동을 벌렸습니다. 백 만 원을 내는 사람 1004명을 모으면 그것이 약 10억 원이 되는데 그 돈으로 병원을 짓겠다는 발상이었습니다. 저희 식구들 여섯이 그 천사병원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저희만 하지 않고 제가 알만한 사람들에게 권하였습니다.

제법 돈 많은 부자로 알려져 있는 어떤 분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돈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 부자에게 돈이 정말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앞 선 욕심으로 말미암은 빚 때문이라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그때 내가 그 사람보다 훨씬 더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현상이 교회 안에도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작과 재정적인 힘이 약했을 때는 은행이 교회에 대출을 잘 안 해 주니까 열심히 저축을 해서 규모 있게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교인수도 늘어나고 따라서 교회 재정의 규모도 커지면서부터 은행이 교회를 신뢰하고 교회에 대출을 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부터 교회 건축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출석 교인 몇 백 명만 되도 몇 십억 정도의 빚은 우습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은행이 교회에 대출하면서부터 우리 한국 교회에는 큰 예배당을 건축하는 붐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예배당들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많은 교회가 빚쟁이가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는 작은 빚쟁이가 되었고 큰 교회는 큰 빚쟁이가 되었습니다.

그 빚을 감당하지 못하여 파산하는 교회도 실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 빚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행들이 교회를 좋은 고객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빚을 감당하여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 빚을 갚기 전까지 교회에는 돈이 없어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그저 생존에만 급급하는 교회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써야 할 때 돈을 쓰지 못하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 눈에 볼 때 지나치게 크고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합니다. 그것이 저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교회적인 사명은 감당하지 못하고 밪 낮 땅만 사고 예배당만 짓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비춰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쇠퇴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큰 예배당을 짓는 이유는 소명 때문이기 보다는 욕심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큰 예배당이 물론 필요하기 때문에 예배당을 짓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키려고 하는 순수한 소명감 때문이지 아니면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야망 때문인지 불분명한 경우도 많습니다. 소명을 가장한 야망은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구별이 어려운 것 중에 하나입니다.

예배당을 짓는 것은 무조건 잘 못 된 것이고 예배당을 짓지 않는 것이 무조건 옳은 일은 아닙니다. 교회에는 원칙적으로 예배당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와 순서에 맞고 규모에 맞는 예배당을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욕심으로 짓게 되면 문제가 됩니다. 규모에 때에 맞지 않게 건축을 시작하면 그 때부터 교회는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때를 알고 먼저 할 것과 나중할 것의 순서를 알며 매사에 절제의 은사가 있어 규모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때에 맞는 삶을 살고 먼저 할 것은 먼저하고 나중 할 것은 나중에 하며 모든 것에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적정하게 균형감각을 가지고 그것이 물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모든 것을 모든 곳에 잘 배분하며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성해 지고 아름다워 질까요? 저는 그런 삶이 욕심납니다.

쓸 때도 없는 그 한도 끝도 없는 욕심 때문에 어리석어져서, 바보가 되어서 때도 모르고 순서도 모르고 모든 것을 낭비하며 쓸데 쓰지 못하고 엉뚱한데 쌓아두고 다 쓰지도 못할 것을 벌고 모을 욕심에 지금 써야 할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다 거기다 갖다 바치며 바보처럼 사는 것이 저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욕심을 버릴 수만 있다면,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고 조금 절제만 할 수 있어도 우리의 삶은 얼마나 지혜로워지고 여유 있게 되는지 모릅니다. 사업이 잘 될 때 사업이 잘 된다고 버는 족족 다 써 버리면 안 됩니다. 당연히 수익은 재 투자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업을 키워나가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건강한 배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수익을 다 사업의 확장을 위하여 재투자하면 안 됩니다.

얼마만큼은 함께 일한 노동자들에게 돌려 주어야 합니다. 얼마만큼은 자기가 먹기도 하고 쓰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만큼은 사회를 위하여 환원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사업의 확장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거기가 쏟아 붓는 사람보다 좀 늦을는지도 모릅니다. 뒤쳐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훨씬 더 지혜롭고 건강한 것입니다.

교회 사택에 살게 되면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집을 전세 놓았습니다. 그 받은 전세금으로 저는 당시 스미스 코로나 전동타자기 두 대를 샀습니다. 하나는 영문타자였고 또 하나는 한글 타자였습니다. 거의 미친 짓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적절하고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타자 능력이 아주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타이핑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저는 책을 참 많이 썼습니다. 다작에 가깝습니다. 물론 책들이 타자 능력으로만 쓰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에게 빠른 타이핑의 능력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책들을 그렇게 쉽게 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정확히 설명을 못드리겠습니다만은 저는 인생에 몇 번은 전세금을 뽑아 전동타자기를 사는 것과 같은 일들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에만 욕심이 있어서, 그 돈을 불리고 늘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 일만 하며 살게 된다면 돈은 혹시 남보다 더 벌고 모을는지는 모르지만 그것 못지 않게,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들을 잃게 될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밭에 감추인 보화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집을 팔아서라도 그 밭을 산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 예수님의 비유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생을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본다면 이제 저도 드디어 그 마지막 단계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인생이 다 끝나기 전에 정말 보화가 숨겨져 있는 밭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밭을 사기 위해서 아낌없이 집을 팔아보고 싶습니다. 집을 팔아도 아깝지 않을 그런 일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쓴 책 중에 ‘깨끗한 부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쓴 후 참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우리 한국 사회에는 가난해야만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중에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꼭 가난해야만 훌륭한 것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훌륭해지기 위하여 구태여 가난해지려고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저는 제 소유의 집도 있고, 제 소유의 자동차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면 가능한한 죽을 때까지 그 정도의 여유를 갖고 살고 싶습니다. 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너무 옹색하지 않게 살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끝까지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나치지 않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 삶의 유일하고도 가장 높은 가치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잘못하다가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너무 많이 소유하고 살다가 갈까봐 두렵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다이어트를 하듯, 건강한 몸무게를 늘 유지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그 동안 죽을 때 하나님께 남겨 드릴 유산에 대해서 참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가족이시니 가족의 일환으로 받으셔야 할 상속분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 상속분을 죽은 후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미리미리 하나님을 위하여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죽은 후의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의 삶이 더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당만 지으면 안 됩니다. 사업하시는 분들 사업만 하시면 안 됩니다. 사업만 확장하셔서는 안 됩니다. 욕심으로, 쓸데없는 욕심으로 평생 빚만 지다가 가셔서는 안 됩니다. 욕심을 줄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돈도 쓰고 시간도 쓰면서 사셔야만 합니다. 쓸데 없는 일에, 다 쓰지도 못할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물질을 쓰시면서 사시는 분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쓸데 없는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욕심이 없어져서 정말 욕심부려야 할 것에는 욕심 없이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선한데는 지혜롭고 악한데는 미련하라는 로마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과 자신에 대해서는 좀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큰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높은 뜻 교회 안에 많아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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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 (로마서 4:3~8)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 설교, 2009-10-04

지난 주일 “고향 가는 길, 행복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행복에 관하여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이 행복에 관해서 생각을 나누어 볼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일부러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행복이며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 생각과 대답이 사람마다 다 다른 것 같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한 것 같은 사람이 그 자신은 매우 불행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자기 스스로는 행복해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참으로 불행하게 여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행, 불행의 잣대가 의외로 많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행복의 기준이란 없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스스로 행복하다 여기며 살게 내버려두시는 그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는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가에 관하여 수없이 많은 언급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 6-8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사람마다 제 나름대로의 행복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아주 특이한 행복관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돈, 권력, 명예, 건강, 가족 같은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있어야 행복하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참 “메니 메니(many many)”입니다. 그거 부인하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정말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전도서에도 보면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전10:19) 했습니다. 그야말로 돈은 거의 모든 일에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돈에 대한 욕심 없이 사는 사람조차도 돈이 있으면 그래도 뭔가 든든하고 여유가 있으며 돈이 너무 없으면 어딘가 불안하고 우울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돈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인가 묻는다면 결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얼마든지 있으며 돈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의 참 주인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것을 각 사람에게 맡기신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궁극적인 데로 나아가지 않고 중간적인 데, 수단적인 데 머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아무리 사랑해도 좋기만 하지만 돈은 너무 사랑하다가는 큰일 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파멸로 이르는 길임을 성경은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디모데 전서 6장 7-12절에서 사도 바울이 한 말을 들어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이 말씀을 우리는 두고두고 음미하며 가슴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딤전6:7) 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재물을 많이 쌓고 죽기까지 움켜쥐고 있어봐야 하늘나라에는 단 하나의 보화도 쌓이지 않습니다. 어느 것 하나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있는 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거나 선한 일에 쓰면 그것이 하늘의 보화로 쌓이게 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막10:21, 눅18:22). 우리는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 터인데 세상에 쌓아둔 보화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의 행복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어서 한 말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8)입니다. 그저 먹고 입는 데 부족함이 없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 욕심을 부리다가 당하기 쉬운 불행을 그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한 말도 되새겨 볼만한 말씀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느니라.”(딤전6:9-11-12)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 아니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 영생을 취하라.” 했습니다. 그저 부하려 하고 무작정 돈을 사랑하기를 피해야 영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그저 끊어지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지극히 행복한 삶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것은 돈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돈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보다 권력 잡기를 더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문학적인 돈을 써가면서 국회 같은 데 진출하려고 합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 권력 부리는 맛을 한 번 본 사람은 대부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일생 번 돈 다 탕진하고 집까지 팔아가며 정치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권력이 결코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권력도 궁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역대상 29장 11-12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했습니다. 또 신약성경 로마서 3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권력의 주이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권력을 추구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위험한 일은 없으며 그렇게 해서 결코 행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에는 별 관심이 없이 명예를 쌓고 지켜가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행복이 더 고상해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에 대한 욕심도 지나치면 패가망신할 수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 가지고 유혹해서는 넘어지지 않던 사람들이 명예욕 때문에 실족하여 오랜 세월의 삶을 불명예로 더럽히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모든 사람의 이름을 높이고 낮추는 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인데 모든 영광의 궁극적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뜻에 반하여 명예를 탐하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일일 뿐입니다.

“아무리 돈이 있고 권력을 쥐고 있으며 명예를 누리고 있으면 뭐하느냐? 건강해야지.” 하며 건강을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관리에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운동할 때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으니 열심히 운동하여 건강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 자체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건강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인지 운동을 하기 위해서 건강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살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인지 운동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과 건강도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치의 병을 고치기도 하시고 생명을 거두어가기도 하시는 하나님에게서 행복은 오는 것이지 운동과 건강 자체에서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행복의 열쇄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건강도 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추구하며 가정의 행복이라는 지고지선의 가치 앞에서는 모든 것을 다 하위개념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칭송할만한 가치관, 행복관으로 평가하고 존중할만합니다. 그러나 가정을 만드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가정을 행복하게 하시고 번영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잊는다면 가정의 행복은 지속적으로 보장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그 주인이신 가정만이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다 모여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고난을 이기게 하는 데 있어서 가족끼리의 사랑보다 더 큰 어떤 인간적 힘은 없을지 몰라도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가족의 행복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모든 가정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과 기도의 손을 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와 모든 인간의 창조주이십니다. 따라서 그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행복한 삶의 원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일찍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10:12-13을 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행복을 위해서 인간이 지킬 명령과 규례를 주셨습니다. 그대로 행하면 행복은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놀라운 일을 감행하셨습니다. 대사면의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시고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위해 우리 자신은 한 일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형수 또는 무기수로서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조건 사면과 석방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돈이며 권력이며 명예며 건강이며 가족이라 할지라도 참된 행복을 안겨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고 공포되고 의인으로 인정받아 출옥하여 자유롭게 될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그런 행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주어져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또> 해서 수억 원이나 수십억 원을 타게 되면 대박 터졌다고 합니다. 일확천금하는 것입니다. 단 번에 수억 원이나 수십억 원을 받을 만한 수고를 하거나 공을 세운 일이 없는 데 그런 돈을 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박 중의 대박, 대박의 원조는 바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불법과 죄를 용서받을 만한 대단한 공적을 세운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믿기만 하면(본문 5절)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시고 우리의 불법을 사해주시며 죄를 가려주시고 그 죄를 죄라 인정하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보다 더 큰 대박은 없습니다. 대박이고 대복입니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는 것은 그것이 수억 원, 수십억 원 주고도 살 수 없는 내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또> 해서 수십억 원의 상금을 타게 되었는데 그것을 내팽개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영원히 복된 삶을 외면하는 사람은 미쳐서 죽기로 작정한 사람일 수밖에 아닙니다. 이 행복, 이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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